19세기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의 1838년 작 ‘해체를 위해 최후의 정박지로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 호’는 역사의 한 시기가 종결되는 순간을 장엄한 풍경화 양식으로 구현한 낭만주의 미술의 걸작이다. 이 그림은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게 완벽한 승리를 안겨준 전함 테메레르 호의 마지막 모습을 담고 있다. 한때 영국 해군을 상징하던 화려한 전함이었으나 산업혁명 시기 증기선의 등장으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범선 테메레르 호.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작은 증기선에 이끌려 서서히 항구로 예인되고 있는 이 배는 곧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될 운명에 놓여 있다. 그림의 우측에는 석양빛에 물든 하늘과 바다가 노란색, 주황색, 붉은색의 톤으로 거칠게 채색되어 있어 해가 질 순간이 멀지 않았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터너의 색채 기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작품은 그림의 주제가 서사 구조가 아닌 빛과 색채의 특성을 통해 관람자들에게 전달되는 새로운 회화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807년에서 1837년까지 영국 왕립아카데미의 교수로 재직했던 터너는 색채 효과로 그림 속 공간감을 표현하는 대기원근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에게 1810년 출간된 괴테의 ‘색채론’은 깊은 감명을 주었다. 괴테는 이 책에서 색채 인식이 인간의 정서 및 정신과 연관되어 있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괴테는 색이 그림자와 빛의 만남에서 생겨나며 색에는 물리적, 화학적 특성 외에도 감성과 도덕성이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색이 언어처럼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괴테의 이론은 색의 정서적 효과에 관해 탐구하던 터너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터너는 ‘전함 테메레르 호’에서 빛과 색채 효과를 통해 작가의 주관적 감흥을 화면에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자신만의 새로운 화풍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주어진 소명에 최선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모든 위대한 존재에 대한 예우와 애도를 담은 이 작품은 지금 현 시점의 우리에게도 강한 울림과 감동을 전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