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를 먹여 살리는 일등 공신이었던 반도체가 흔들리고 있다. ‘반도체 1위’라는 자부심은 강력한 경쟁 기업들의 견제로 공허해지고 있고 우리나라 수출을 지탱하던 굳건한 지위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경쟁자이자 최대 시장인 미국과 중국이 자국 중심으로 높다란 장벽을 치며 추격에 속도를 내고 있고 글로벌 공급망 위기, 소비 침체 등까지 맞물리면서 위기가 심화하고 있다. 이런 악재 속에서 끝없이 오를 것만 같았던 반도체 수출은 역성장의 덫에 걸려드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위기는 한국 경제의 위기로 직결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초격차는 옛말…반도체 수출 ‘역주행’
25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성장을 거듭하던 국내 반도체 수출은 지난달 26개월 만에 감소세로 전환하면서 역주행을 시작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수출입동향을 보면 우리나라 반도체 수출액은 8월 기준 107억 82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7.8% 줄었다. 반도체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하락한 것은 26개월 만에 처음이다.
지난해부터 올해 1분기까지 매월 전년 동기 대비 20~40%까지 고공 성장하던 반도체 수출은 3월 38% 상승 이후 4월 15.8%로 반 토막 나며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후 7월에 2.1% 성장으로 뚝 떨어지더니 8월에는 기어코 역성장으로 이어졌다.
반도체는 여전히 국내 전체 수출의 20%가량을 차지하는 대표 품목이지만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글로벌 경기 침체 여파로 반도체 수요가 크게 줄면서 삼성전자(005930)·SK하이닉스(000660) 등 국내 반도체 대표 기업들의 재고가 급격히 쌓이고 있다. 6월 말 기준 삼성전자의 재고는 52조 922억 원, SK하이닉스는 11조 8787억 원이다. 두 회사 재고 모두 역대 최고다.
반도체 시장의 불황 속에서도 특히 국내 업체들이 주도하는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악화가 빠르다는 점이 뼈아프다. D램·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반도체의 가격이 빠르게 떨어지면서 불황 사이클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다. D램 고정가는 1분기 3.41달러에서 2분기 3.37달러로 떨어졌고 3·4분기 전망치도 2.88달러, 2.50달러로 계속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낸드 고정가도 지난해 2분기 4.56달러에서 지난달 기준 4.42달러까지 내리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비메모리 부문의 추격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국내 기업들이 선전하고 있는 이미지센서 또한 역성장 전망이 제기되는 등 쉽게 활로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시장조사 기관 IC인사이츠의 분석에 따르면 대표적 비메모리반도체인 시모스(CMOS) 이미지센서 시장의 글로벌 매출 규모는 186억 달러로 지난해보다 7%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출하량은 지난해 대비 11% 줄어들 것으로 추정됐다. 올해 시장 규모가 감소하면 13년 만에 첫 역성장이다. CMOS 이미지센서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2위, SK하이닉스는 6위를 차지하고 있다.
반도체 시장에 먹구름이 드리운 원인은 복합적이다. 계속되는 공급망 위기에 글로벌 인플레이션 확산, 경기 침체로 인한 소비심리 악화, 중국의 주요 도시 봉쇄, 중국에 대한 미국의 수출규제 등 온갖 악재가 더해지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반도체 전문가 3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58.6%는 “반도체 위기가 내후년 이후에도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76.7%의 전문가는 현재 반도체 산업이 처한 상황을 ‘위기’라고 진단했다.
美·中, 정부와 기업 ‘원팀’…韓 ‘먼 산 불구경’
글로벌 위기와 반도체 시장의 기술 패권 경쟁 양상이 도드라지면서 미국과 중국 등 주요 국가들이 보호무역주의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미국·중국·유럽연합(EU)·일본 등도 자국 기업 또는 자국 내 투자 기업에 지원을 몰아주면서 반도체 시장 경쟁이 국가별 대항전처럼 고착화되는 모습이다.
미국 의회는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전략산업의 자국 중심 지원을 위해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산업육성법 등을 연이어 통과시켰다. 중국은 2015년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후 국가 차원에서 지원을 쏟아내는 중이다. 일본도 이에 질세라 올 5월 참의원(상원)에서 반도체 공급망 강화 등을 위한 ‘경제안보법’을 의결했다. EU는 2030년까지 430억 달러를 지원하는 ‘반도체 법안’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경쟁국들의 정부·기업 간 ‘원팀’ 체제가 뚜렷해지는 반면 한국은 기업과 정부·국회·지방자치단체가 모두 따로 놀고 있다. 정부는 ‘반도체 초강대국’을 이루겠다며 다양한 구상을 내놓고 있지만 여소야대 국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는 정쟁에 몰두하며 첨단산업 지원 논의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 120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지만 지자체의 공업용수 취수 문제 제기로 발목이 잡혀 착공을 못 하고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반도체 공급 과잉, 글로벌 수요 감소, 재고 증가에 따른 가격 하락, 중국의 빠른 기술 추격,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심화 등 리스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면서 반도체 산업의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다”며 “장단기 이슈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이 상당 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