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무대를 질주하던 한국 전기차에 경고등이 들어왔다. 중국을 넘어 미국·유럽연합(EU)·신흥국에까지 ‘전기차 보호주의’가 확산하면서다. 주요국은 자국의 전기차가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보조금을 비롯한 각종 규제를 마련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산 전기차가 뛰어난 상품성을 갖췄지만 세계 각국의 심화하는 보호주의를 넘어서기는 어렵다”며 “판매 확대를 위한 대응책뿐 아니라 전기차 산업 전반을 선제적으로 육성할 방안까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제언했다.
◇보호주의 확산에 연간 10만 대 수출 타격 우려=4일 완성차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시장에서 전기차를 둘러싼 보호주의 성격의 규제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미 행정부가 8월 제정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대표적이다. IRA는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만 최대 7500달러(약 1000만 원)의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했다.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 현대차그룹은 당장 판매 감소를 걱정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현대차·기아가 올 상반기 미국에서 친환경 차를 판매하며 받은 보조금은 3억 1650만 달러(약 4500억 원)에 달한다. 산술적으로 따져보면 양사는 연간 9000억 원 이상의 보조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
업계에서는 IRA가 사실상 미국 완성차 제조사를 위해 설계됐다고 판단한다.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차종 80%가 미국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미 에너지부에 따르면 이달 기준 IRA에 따라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차종은 28개로 이 가운데 22개가 제너럴모터스(GM)·포드 등 미 제조사 제품이다. 심지어 미국에서 생산되는 폭스바겐의 신형 전기차 ‘ID.4’조차 혜택을 받지 못할 정도로 수혜 조건이 까다롭다.
이 뿐만이 아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해 1월 취임 4일 만에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연방정부가 보유한 차량을 미국에서 생산된 전기차로 바꾸겠다는 선언이었다. 여기에 노조가 있는 회사에서 생산해야만 구매가 가능하다는 단서가 붙으며 65만 대에 달하는 연방정부 차량은 사실상 미국 제조사의 몫으로 채워지게 됐다.
◇中·EU는 자국 기업에 보조금 적용=미국뿐 아니라 세계 주요국은 자국산 전기차에 유리한 규제를 겹겹이 마련하고 있다. 중국은 일찍부터 자국 기업 배터리를 적용한 전기차에만 추가 세제 혜택을 지원하고 있다. 주로 중국 제조사가 생산하는 ‘배터리 교환식’ 전기차에는 판매 가격과 상관없이 보조금을 준다. 전기차와 관련한 주행 데이터를 자국 내에 수집하는 법안도 만들었다. 독일과 프랑스·이탈리아 등 EU 국가들은 저렴한 전기차에 더 많은 보조금을 지급한다. 주로 저가 전기차를 양산하는 르노와 푸조·피아트 등 자국 제조사를 고려한 정책이다. 태국은 현지 생산 계획을 수립한 제조사에만 전기차 한 대당 15만 밧(약 560만 원)의 보조금을 주고 수입관세도 40% 깎아준다.
문제는 세계시장의 보호주의가 IRA를 계기로 더 빠르게 확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 국산 전기차 수출에 차질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는 IRA를 계기로 국산 전기차 수출이 매년 10만 대 이상 감소할 수 있다고 내다보기도 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이미 IRA 제정 이후 미국에서 국산 전기차 판매가 줄어들 조짐이 보인다”며 “자칫 미국에 자극받아 중국이나 EU·신흥국이 전기차 규제를 강화하면 국내 제조사에 치명타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韓, 국산 전기차 보호장치 미흡=주요국과 달리 우리는 국산 전기차를 보호하는 형태의 정책이 전무하다. 가격 기준만 충족하면 수입차에도 보조금을 동일하게 지급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올 상반기 수입 전기차에 지급한 보조금만 해도 822억 원에 달한다. 전체 지급된 보조금의 20%를 차지하는 규모다.
업계에서는 우리도 국산 전기차를 우대하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자체 충전 인프라’ 보유 여부, ‘정비 네트워크’ 규모처럼 제조사가 국내에 재투자를 얼마나 했는지 따져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국내 업계가 앞선 기술을 보유한 수소버스에 더 많은 보조금을 주는 등의 방안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주요국이 전기차에 보호주의 장벽을 세우는 것은 단지 자국산 전기차 판매를 늘리기 위한 차원이 아니다. 전기차 산업 육성에 속도를 내 미래 차 시장 전체를 선점하겠다는 의도가 이면에 깔려 있다.
미국은 지난해 제정한 ‘하부구조법’ 예산 1조 달러 중 75억 달러(약 10조 8000억 원)를 주정부 충전기 설치에 투자해 2030년까지 충전기 50만 개를 확충할 계획이다. 올해 제정된 ‘방위생산법’은 전기차용 배터리와 부품 개발에 31억 달러(약 4조 5000억 원)를 지원하는 내용을 담았다. 2000억 달러(약 288조 원)를 투자하는 ‘반도체 및 과학법’까지 포함하면 미국의 미래 차 관련 투자액은 총 2106억 달러(약 303조 원)에 달한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이미 2011년에 7대 신흥 산업으로 전기차를 선정해 국가 차원의 연구개발(R&D), 인력 양성, 인프라 구축을 실행해왔다. 전문가들은 우리 정부도 보조금 체계를 개편하는 것을 넘어 미래 전기차 산업을 포괄할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미래 차는 결국 ‘돈’과 ‘사람’ 싸움이다. 미국과 중국은 미래 차 산업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쏟아붓는데 우리는 적절한 투자도, 인재 육성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