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처럼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는 요소수만 없어도 난리가 나기 때문에 글로벌 공급망을 관리할 기관이 있어야 됩니다. 통계청보다 더 중시해서 만들어야 할 게 ‘데이터청(廳)’이에요. 국가정보원처럼 전 세계 산업·자원 정보를 전담할 ‘산업정보원’도 별도로 둬야 합니다.”
염재호(67) SK(034730)㈜ 이사회 의장은 최근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사무실에서 서울경제 취재진과 만나 무역 적자의 늪에 빠진 상황에서 한국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염 의장은 취재진이 어떠한 질문을 던져도 막힘없이 대안을 쏟아냈다.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해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깊이 고심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지금 데이터가 얼마나 많습니까. 글로벌 가치사슬에 대한 정보를 수집·분석하는 국정원보다 더 강력한 산업 데이터센터가 필요한 시대가 됐어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려고 보호무역주의로 가고 있는데 글로벌 패권 다툼이 심화할수록 자국 중심주의가 더 강화될 겁니다.” 염 의장의 전망이었다. 그는 이어 “중동 원유 문제나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이 나오면 국가가 휘청이지 않느냐”며 “그런 정보를 사전에 입수해서 막아야지 사후에 대응하려면 지금처럼 힘들다”고 꼬집었다. 기업이 한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글로벌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만큼 기업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적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염 의장은 정부가 데이터·공급망 정보 수집 기관을 만드는 것이 여의치 않다면 기업들의 싱크탱크(정부 정책·기업 전략 연구소) 운영에 인센티브를 부여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도 내놓았다. 그는 “미국은 싱크탱크만 3000개나 되는데 우리도 기업이 이를 만들겠다고 하면 세제 혜택을 많이 줘야 한다”며 “지금은 경제도 총체적인 안보 문제라서 어디에 저렴한 원자재가 있는지 등의 정보는 기업이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염 의장은 지금 같은 미중 갈등, 자국 보호주의 강화 국면일수록 한국이 대체 불가능한 기술력으로 안보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염 의장은 특히 새 강대국이 부상하면 기존의 강대국이 이를 두려워하게 되는 과정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는 뜻의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용어를 들며 “강대국 간 갈등에서 이스라엘처럼 철저히 장사만 하는 경우도 있으나 우리는 북한의 존재가 있어서 입장이 다르다”고 분석했다.
그는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 한반도나 남중국해에서도 무력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며 “그런 경우에도 반도체·배터리 등 ‘한국이 공격을 받으면 전 세계의 공급망이 충격을 받는다’는 수준의 핵심 기술이 10개만 있어도 우리 안보를 지킬 수 있다”고 짚었다. 초격차 기술만이 미중 갈등과 글로벌 보호주의 환경에서 한국 경제가 생존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설명이다.
고물가·고환율·고금리 등 이른바 3고(高) 복합 위기의 파도가 몰아치는 상황에서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을 묻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국가의 인위적인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염 이시장은 “정부는 죽기 살기로 싸우는 기업들에 괜한 훈수를 두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낫다”며 “축구장의 잔디만 잘 깎으면 되지 그라운드에 서서 선수들에게 지시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기업 활동에 대한 정치권의 태도에 그만큼 실망했다는 뉘앙스가 강했다. 그는 국내에 만연한 반(反)기업 정서부터 서둘러 해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경쟁 국가들이 앞다퉈 미래 산업 육성에 나서는 상황에서 우리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 염 의장의 지론이었다. 염 의장은 “리쇼어링(해외 이전 기업의 국내 복귀)이 계속 심화할 텐데 우리는 법인세 감면 같은 정책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며 “예컨대 바이오를 육성할 생각이면 택스프리존(면세 구역) 같은 지원을 해줘야 한다.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겠다고 스타트업에만 돈을 대주고 정작 세계와 싸우는 대기업에는 잘못만 묻는다”고 지적했다. 염 의장은 그러면서 “국세에서 법인세가 차지하는 비중만 26%에 달한다”며 “국세의 약 30%는 소득세인데 이 가운데 절반 이상도 기업에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내는 세수다. 회사는 보유 재산에 대한 세금도 따로 낸다”고 지적했다. 국가 세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기업을 육성해 재정과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 중요한데 ‘대기업 지원=특혜’라는 낡은 이념의 덫에 함몰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염 의장은 앞으로 사회에서 기업인들이 맡는 역할도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 자체를 바꾸는 선두에 설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그는 “18세기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사상가들이 사회를 바꿨지만 지금은 사상가도, 정치인도 아닌 빌 게이츠, 일론 머스크, 스티브 잡스 같은 기업가가 사람들의 삶을 혁신한다”며 “기업가들도 이제 납세 등 소극적으로 사회에 기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평가했다. 그는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등 적극적으로 사회문제에 관여하고 책임도 지고 목소리도 내야 한다”며 “이제 기업인들이 목소리를 내는 방향으로 문명사가 달라질 것”이라고 관측했다.
염 의장은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이른바 ‘노란봉투법’, 산업재해가 발생했을 때 경영자를 처벌하는 ‘중대재해처벌법’ 등 기업을 옥죄는 제도들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경제 규제는 풀고 사회 규제는 강화해야 한다”며 “직원 몇 만 명을 데리고 있는 경영자가 모든 사고를 어떻게 다 책임지느냐. 같은 논리라면 재해 발생 시 대통령, 야당 대표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사회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지 않고 기존의 것은 다 잘못됐다는 식으로만 접근한다”며 “미래 기획을 해 주는 사람은 없고 과거를 단죄하는 사람들만 있어 상황이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기업의 미래를 위협하는 저출산 문제에도 염 의장은 강한 우려를 내비쳤다. 그는 “그리스의 스파르타도 금욕주의에 따른 저출산 문제를 노예로 충당하려다가 군사력이 약화하면서 무너졌다”며 “지난해 정부의 저출산 예산이 43조 원인데 출생아 26만 명에게 1억 원씩 나눠줬어도 남았을 수준으로 비효율적 집행이 이뤄지고 있다”고 역설했다.
염 의장은 우리 대기업이 지향해야 할 경영 방식을 두고는 소유(오너) 경영과 전문 경영을 융합하는 형태를 추천했다. 오너 경영은 장기·책임 경영에 강점을 보이는 형태로 두되 각종 복잡한 기업 현안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는 방식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생각이었다. SK그룹 역시 경영 영역을 체계적으로 나눠 최태원 회장은 기업 비전과 조언자 역할만 맡고 나머지 세부 사안은 전문 경영인이 최종 결정권까지 쥔다고 소개했다.
염 의장은 “‘SK 퓨처 리더 프로그램(SFLP)’ 등을 통해 차기 리더로 키울 젊은 직원을 매년 뽑아 훈련시키고 있다”며 “최 회장도 경영 시간의 15%를 이들에게 쓰고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이어 “외국 기업의 경우 이 같은 시스템을 발판으로 항상 최고경영자(CEO) 상비군을 3~4명씩 두고 있다”며 “SK㈜ 이사회도 인사위원회를 통해 CEO 후보군을 상시 관리하고 있다. 앞으로 이 같은 CEO 육성 방법을 전 계열사로 확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염 의장은 ‘대기업 이사회는 총수의 거수기’라는 일각의 의구심에 관해서도 적극 반박했다. SK㈜ 이사회는 2019년부터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직을 맡으면서 이사회가 경영진을 견제·보완하도록 운영하고 있다. 염 의장은 2019년 3월 이후 현재까지 3년 이상 이사회를 이끌고 있다.
염 의장은 “지난해 이사회를 14번 열었는데 안건마다 이사회 산하 위원회 등에서 2~3시간씩 수차례 논의·수정해 회의에 올라오다 보니 당연히 거부하는 게 많지 않다”며 “정부의 국무회의도 차관회의 등에서 이미 다 조율된 게 올라오기에 거부되는 안건이 없다. 이사회가 거수기라는 건 국무회의도 거수기라는 논리”라고 말했다. 그룹 내 이사회의 주요 역할에 대해서는 “세계적 흐름이나 위험 관리 등에 집중하면서 미래를 위한 포석을 놓는 작업을 한다”며 “특히 투자전문회사로 변모를 선언한 SK㈜는 지주회사로서 배당만 받고 군림만 하는 게 아니라 선제적 상생 투자나 인류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투자 등도 모색한다”고 밝혔다. 정리=윤경환 기자 사진=권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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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서울 △서울 신일고 △고려대 행정학 △고려대 행정학 석사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 △1990년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2007~2013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문위원 △2009~2013년 한국연구재단 BK21 사업관리위원회 위원 △2010년 외교통상부 정책자문위원회 자문위원장 △2010~2015년 행복나눔재단 이사 △2010~2015년 서울시 산학협력포럼 회장 △2011~2013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 △2012~2015년 우정사업운영위원회 위원장 △2012~2015년 한일미래포럼 대표 △2014~2015년 기획재정부 공공기관 경영평가단 단장 △2014년 한국고등교육재단 이사장 △2015~2019년 제19대 고려대 총장 △2019년~ SK㈜ 이사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