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이 산유국들의 대규모 원유 감산을 주도한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 재설정과 안보 지원 철회를 거론하며 연일 강경한 입장을 쏟아내고 있다. 선거를 앞둔 민감한 시점에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수 있는 감산을 강행한 사우디에 조 바이든 행정부는 의회와 힘을 합쳐 보복할 방침임 시사했다. 사우디는 국왕이 직접 “원유 시장의 균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80년 혈맹인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중간선거를 전후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16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좌관은 이날 “바이든 대통령이 중간선거를 앞두고 원유 감산을 결정한 사우디와의 관계를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대통령은 급하지 않게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움직일 것”이라며 “민주·공화 양당 의원들과 논의해 여러 대응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설리번 보좌관은 체계적인 대응 옵션과 관련해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군사 지원 변화도 포함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첨단 무기 수출 제한을 포함한 다각적인 보복 조치가 검토되고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는 이어 바이든 대통령이 다음 달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사우디의 최고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만날 계획이 없다고 못 박았다.
앞서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포함한 산유국 협의체 OPEC+는 이달 5일 회의에서 미국의 만류에도 원유 생산량을 하루 200만 배럴씩 줄이기로 합의했으며 이 과정에서 사우디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감산 결정 직후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가 러시아 편에 섰다”며 “대가(consequences)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사우디와 OPEC 회원국들은 식을 줄 모르는 백악관의 분노를 진화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은 이날 국정자문회의 연설에서 “석유는 글로벌 경제 성장에 중요한 요소”라며 “사우디는 국제 원유 시장의 안정과 균형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살만 국왕은 지난달 빈 살만 왕세자의 중재로 러시아에서 미국인을 포함한 전쟁 포로 10명이 풀려난 사실을 거론하며 “사우디는 평화의 중재자”라고도 덧붙였다. 국정의 실권을 아들인 빈 살만 왕세자에게 넘기고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살만 국왕이 원유 감산에 대해 언급한 것은 미국의 반발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외신들은 분석했다. 미국과 불편한 관계인 빈 살만 왕세자 대신 자신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감산을 통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의도가 없었다는 점을 호소했다는 것이다.
빈 살만 왕세자의 동생인 칼리드 빈 살만 사우디 국방장관도 해명에 나섰다. 그는 이날 트위터에 “OPEC+의 만장일치 감산 결정은 순전히 경제적 이유에 따른 것”이라며 “누군가는 '사우디가 러시아 편에 섰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사우디가 이란과도 편을 먹었다는 것인가”라고 항변했다. 사우디와 적대 관계인 이란도 원유 감산에 동조한 OPEC 회원국이라는 점을 부각한 것이다.
다른 산유국들도 원유 감산이 경제 사정을 감안한 결정이었다고 강조하며 미국 달래기에 동참했다. 이라크 석유수출공사(SOMO)는 이날 성명에서 “불확실한 시기에 최선의 대응책은 시장 안정을 위한 선제적 접근이라는 데 OPEC+ 회원국들의 의견이 일치했다”고 밝혔다. 오만 에너지부도 “감산 결정은 시장 데이터와 변수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해명에도 미국이 사우디와 관계를 개선할지는 미지수다. 뉴욕타임스(NYT)는 “워싱턴 정치인들은 사우디의 감산 결정에 중간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본다”며 “민주당 내에서 권위주의 국가인 사우디와의 관계 재정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전부터 있었던 만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때부터 굳건히 지켜온 양국 간 동맹 관계가 기로에 섰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