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러미 헌트 영국 신임 재무장관이 소득세율 인하 계획을 무기한 연기하고 에너지 요금 상한 동결도 재검토하기로 하는 등 리즈 트러스 총리의 감세안 대부분을 되돌리겠다고 17일(현지 시간) 밝혔다. 시장 혼란을 초래한 감세안이 사실상 철회되면서 시장은 일단 반색했다. 다만 감세안 철회로 리더십에 치명상을 입은 트러스 총리에 대한 퇴진 압박은 더욱 거세지는 분위기다.
헌트 장관은 이날 오전 긴급 영상 기자회견을 열고 “어떤 정부도 시장을 통제할 수 없으나 공공 재정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줄 수는 있다”며 이달 말 공개 예정이던 예산안 일부를 앞당겨 발표했다. 내년 4월로 예정됐던 소득세 기본세율 인하(20→19%) 방침은 경제 여건이 허락할 때까지 무기한 보류하고 에너지 요금 상한 동결 방침도 내년 4월 이후 재검토하기로 했다. 이로써 주택 취득세에 해당하는 인지세 부과 기준을 25만 파운드로 상향 조정하는 방안을 제외한 감세안의 대부분이 폐기됐다.
헌트 장관은 이어 “앞으로 세금 및 공공지출과 관련해 어려운 결정을 더 내려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헌트 장관의 발표 후 전 거래일에 4.3%대를 기록했던 10년 만기 영국 국채 수익률은 3.9%대로 떨어졌고 파운드화 가치는 1% 오른 1.13달러에 거래됐다.
다만 감세안이 사실상 철회되면서 트러스 총리의 입지는 한층 약화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16일 영국 데일리메일은 보수당 하원의원 100여 명이 이번 주 안에 보수당 경선을 주관하는 1922위원회에 트러스 총리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요청하는 서한을 전달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해당 의원들은 당 대표 취임 이후 1년까지 불신임 투표를 면제해주는 보수당 규정을 변경해서라도 트러스 총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친정’의 당심(黨心)을 완전히 잃은 트러스 총리가 이번 주 안에 축출될 가능성도 나온다.
트러스 총리를 겨냥한 공개 비판도 이어지고 있다. 스튜어트 로즈 보수당 상원의원은 “총리는 기업과 투자자, 유권자와 당 동료들의 신뢰를 모두 가져야 하지만 트러스는 이 가운데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투자은행 에버코어의 앨리슨 칸와스 선임고문은 “트러스는 역대 최단명 총리가 돼야 한다”며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이런 가운데 일간 더타임스는 보수당이 15일 비밀 회의를 열고 벌써 트러스 총리의 후임에 대해 논의했다고 전했다. 지난 경선에서 트러스 총리와 마지막까지 경쟁한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과 역시 경선에 출마했던 페니 모돈트 국제무역장관이 물망에 올랐으며 쿼지 콰텡 전 재무장관의 후임으로 발탁된 ‘반(反)트러스’ 인사 헌트도 차기 주자로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