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은 서울 여의도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 A4 용지 10쪽 분량의 취임사를 들고 연단에 올라섰다. 국민을 대표하는 300명의 입법기관을 상징하는 국회에서 윤 대통령은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3월 10일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날 “의회와 소통하고 야당과 협치하겠다. 국정 현안을 놓고 국민들과 진솔하게 소통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대통령 신분으로 국회를 찾은 첫 무대에서 윤 대통령은 ‘통합’ 대신 다수의 횡포를 예로 들며 ‘반지성주의’를 외쳤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을 겨냥했다는 해석이 곧바로 나왔다.
그날로부터 윤석열 정부는 1기 내각을 완성하는 데 181일이 걸렸다. 문재인 정부의 경우 195일이 소요됐지만 대통령직인수위원회 2개월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무리다. 윤석열 정부는 2005년 인사청문회 대상이 모든 국무위원으로 확대된 이래 1기 내각을 가장 늦게 구성한 정부가 됐다. 보수 정권이었던 이명박(MB) 정부(17일)의 열 배, 박근혜 정부(51일)보다 세 배 이상 늦었다.
윤석열 정부는 5명의 장관이 도덕성 문제 등으로 낙마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14명의 고위직 인사를 국회 인사청문보고서 없이 임명을 강행하면서 내각의 진용을 모두 갖췄다. 취임 6개월 동안 윤석열 정부가 내각을 완성하기 위해 야당과 그야말로 전쟁을 치렀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정치권이 눈여겨보는 대목은 거야의 발목 잡기에도 반작용이 없는 여론이다.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6주째(한국갤럽 기준) 24~30%대에 머물러 있다. 국민들은 야당의 반대보다 윤 대통령의 국정 수행이 문제라는 데 더 크게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169석으로 단독으로 입법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데다 여론까지 등에 업은 민주당은 639조 원의 내년도 예산안과 국정과제 입법을 막고 있다.
윤 대통령의 국정 난맥상이 이른바 ‘반지성주의 연설’로 대표되는 취임사와 이어진 내각 인선에서 돌출됐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대선 승리 후 25일 만인 4월 3일 노무현 정부 인사이던 한덕수 전 총리를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목했다. 야당에 협치를 제안하는 동시에 내각 지휘자인 총리를 서둘러 임명해 코로나19로 어려워진 민생을 취임 즉시 챙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민주당은 이에 딴지를 걸었고 윤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리던 5월 10일에도 임명되지 못했다. 한 총리는 결국 역대 정부 총리 가운데 가장 늦은 48일 만에 임명장을 받았다. 이때 윤 대통령이 인수위 당시 총리 인선을 비롯해 용산 대통령실 이전 등 대선 당시 내건 국정과제를 사사건건 반대하는 민주당에 등을 돌리게 됐다는 것이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는 “중도 가치를 지향하는 것 같았던 윤 대통령이 (인수위를 거치며) 의외일 정도로 보수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윤 대통령이 야당을 적대적으로 인식하면서 인사에서부터 협치와 통합의 메시지를 거뒀다는 점이다. 정치권은 윤 대통령의 당선 배경으로 새 사람, 새 정부, 새 정치 등 세 가지를 꼽고 있다. 기존 정치권 출신이 아닌 윤 대통령이 새로운 인재들을 중용해 과거와 다른 정부를 구성하고 민생은 팽개친 채 정쟁만 일삼던 정치판을 갈아엎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주요 부처 장관들과 참모들 대부분을 검찰 인맥과 MB·박근혜 정부 출신 인사들로 채웠다.
심각한 대목은 윤 대통령이 인사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정치적 상징과도 같던 ‘공정과 상식’마저 흔들린 점이다. 김인철 사회부총리 후보자는 특혜 장학금,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는 자녀들의 의대 특혜 입학 의혹이 불거져 물러났고 송옥렬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는 성희롱 발언이 문제가 되며 자진 사퇴했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기존 정치권에 빚이 없어 새 정치를 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던 윤 대통령이 도리어 낡은 방식의 인재를 썼고 전 정부 탓마저 했다”며 “또 야당을 적대시하면서 여야 모두 각자도생의 길로 간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 1기 내각이 181일 만에 완성됐지만 혼선은 계속되고 있다. 169석인 야당의 도움 없이는 윤석열 정부가 기획한 입법 과제는 연말 국회 통과가 불가능하다. 동시에 국정 방향 역시 경로 수정이 불가피하다. 일각에서는 적대 정치가 계속되면 총선을 앞둔 내년에는 ‘패스트트랙 사태’로 물리적 충돌을 겪으며 국회의 기능이 마비됐던 2019년의 정치 상황이 재연될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온다.
지금이라도 윤 대통령이 나서 협치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조언이 그래서 반복된다. 국정에 무한 책임을 진 윤 대통령이 여소야대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밉더라도 야당을 설득하는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이 보여주듯 정치의 중심은 의회가 아니라 대통령”이라며 “불편하더라도 야당을 끌어안고 위기를 극복하자는 정치력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 역시 “야당과 만나봐야 (협치의) 물꼬를 트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며 “영수회담이든 여야 대표 회동이든 만나는 것 자체가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