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9월 윤석열 정부는 ‘반도체특별법’ 등 10대 법안을 야심 차게 꺼냈다. 110대 국정과제 중 우선적으로 국회에서 처리해 성장과 민생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취지에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의욕만 넘친 셈이 됐다. 거야(巨野)로 인해 윤석열 정부의 핵심 철학이 담긴 1차 법안들은 모조리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8일 서울경제의 취재 결과 국민의힘이 윤석열 정부의 첫 국정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내건 10대 법안 중 해당 상임위원회 소위원회를 통과한 법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약자 동행 법안인 장기공공임대주택법과 농촌재생법은 7월과 9월 관련 위원회에 회부된 뒤 소식이 없고 대·중소기업상생협력촉진법은 10월 말 회송(回送)됐다. 또 민생 안전 법안인 아동수당법·스토킹범죄처벌법·노후신도시재생지원특별법·재난관리자원법도 진통을 겪고 있다. 미래 도약 법안인 반도체특별법과 미래인재양성법과 관련해서는 9월 이후 회의조차 열리지 않고 있다. 출범 6개월간 극단적 대치 끝에 국회는 마비 상태가 된 것이다.
민주당은 법인세 완화와 소득세 감면 구간 확대 법안까지 막고 있다. 양곡관리법과 기초연금 인상 등 윤석열 정부의 건정재정 기조를 확대로 선회하는 7대 법안까지 단독 입법하겠다며 실력 행사를 예고했다.
이뿐 아니다. 윤석열 정부의 첫 예산도 험로를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 윤석열 정부는 '민생·약자·미래'에 집중하며 639조 원의 내년도 예산안을 편성해 국회에 제출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싸늘하다. 이대로라면 내년 예산안조차 넘기지 못해 1월 1일 국정이 멈추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까지 나온다.
2024년 총선 등을 겨냥한 선을 넘는 정쟁이 민생 파탄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우려감도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미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 등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에 내몰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데도 정치는 여전히 말로만 민생을 외칠 뿐 진심을 담은 협치의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위기에 대응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방파제를 더 쌓아야 하는데도 나랏돈을 축내는 포퓰리즘 법안만 경쟁적으로 내놓는 형국이다. 박상병 인하대 교수는 “지금은 심각한 위기”라며 “이제라도 윤 대통령과 여야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