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대법 "장애 심하지 않아도 지적장애인 강간죄 적용 가능"

지적장애인 성폭행 사건 무죄 선고하며

'장애 정도' 아닌 주변 상황 등 기준 제시

대법원. 연합뉴스대법원. 연합뉴스




정신적 장애를 지닌 성폭력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장애 정도가 심하지 않은 상태라고 해도 가해자에게 '장애인 준강간죄'를 물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성폭력처벌법 위반(장애인 준강간)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3일 밝혔다. A씨는 2018년 무료급식소에서 알게 된 지적장애 3급인 B씨를 2019년 2월 한 달 동안 다섯 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범행 때마다 "우리집에 가서 청소 좀 하자"는 말로 B씨를 상대로 범행을 벌인 것으로 조사됐다.



1심은 A씨에게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A씨에게 적용된 죄명은 성폭력처벌법상 장애인 준강간이다. 피해자가 신체적·정신적인 장애로 항거불능·항거곤란 상태에 있다는 점을 이용해 저지른 성폭행을 처벌하는 규정이다.



반면, 2심은 사건 당시 B씨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태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정신적인 장애가 '오랫동안 일상·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을 뿐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의 정신장애'를 의미한다"며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의 지적장애로 항거불능·곤란 상태에 있었다는 점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했다. 재판부는 두 사람이 여러 차례 함께 식사하는 등 친분이나 호감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두 사람의 평소 관계를 볼 때 A씨가 B씨의 상태를 인식하지 못했을 수 있다고 보고 원심 판단을 유지했다. 대법원은 "A씨는 이 사건 발생 1년 전부터 B씨를 만나면 심부름을 시키고 용돈이나 먹을 것을 주는 등 알고 지냈다"며 "A씨로서는 B씨가 장애로 인해 항거불능·항거곤란 상태에 있었음을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다만, 대법원은 "피해자의 장애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인지가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와 주변 상황·환경, 가해자의 행위 방식, 피해자의 인식·반응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애인 준강간 혐의 유무를 판단할 때 '장애의 정도'만이 아니라 사건 당시의 조건 전반을 살펴야 한다는 의미다.

대법원 관계자는 "성폭력처벌법상 정신적인 장애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의 장애'로 제한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 하급심의 혼란을 해소했다"며 "향후 유사 사건의 판단에 지침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성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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