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원유 시장이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의 영향에서 점점 벗어나는 분위기다. 국제 원유 가격은 전쟁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특히 미국에서는 주유소에서 파는 휘발유 가격도 지난해보다 싸졌다.
그럼에도 미국을 비롯한 유럽 주요 국가들은 원유 가격 하락은 온전히 반기기지 못하는 분위기다. 현재의 원유가격은 러시아 발 공급 문제는 그대로 둔 채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감소 전망으로 인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9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지난 6월 갤런(1갤런=3.785리터) 당 5달러를 넘겼던 미국 내 전국 휘발유 평균 가격은 8일 기준 갤런 당 3.29달러로 지난해 전체 평균가격인 3.36달러보다 낮아졌다. 유럽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월 말 기준 유럽 지역의 평균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7.17달러였으나 지난 10월 말에는 6.89달러로 오히려 전쟁 전보다 낮아졌다.
휘발유 가격 하락은 국제 유가 하락을 등에 업고 있다.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미국 유가의 벤치마크가 되는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 가격은 8일 배럴당 71.46달러로 전날보다 0.76% 하락했다. 세계 유가의 기준인 브렌트유 역시 1.32% 하락한 76.15달러를 기록했다. 국제 유가는 이번 주 들어서만 10% 가까이 하락했다. 국제유가는 러시아 침공 직후 배럴당 130달러 대로 치솟은 바 있다.
하락의 원인은 수요 감소 때문이다. 오안다의 애널리스트인 에드워드 모야는 “경기 침체 우려가 헤드라인을 장식하면서 유가가 하락했다”며 “유가의 하락이 갑작스러운 것 같지만 실제로 미국과 유럽 등 세계 모든 주요 경제권에서 경제 둔화가 현실화 되면서 석유 수요 전망 수준은 점점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블룸버그이코노믹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올해 3.2%에서 2.4%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2009년과 2020년을 제외하고 1993년 이후 가장 낮은 전망치다. 블룸버그통신은 “세계 경제는 30년 만에 최악의 연도 중 하나를 맞이하고 있다”고 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공개한 설문에서 전문가들은 미국의 침체 가능성을 85%로 봤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12개월 내 침체 가능성은 로이터의 12월 조사 결과 80%로 나왔다. 지난달은 78% 였다. 영국 상공회의소는 이미 영국이 5개월 째 침체를 겪고 있고 2024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수요 감소가 러시아의 전쟁에 따른 공급 감소 보다 원유 가격에 더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WSJ는 “석유 트레이더들은 5일 발효 된 러시아 원유에 대한 가격 상한제 제재가 시장 공급을 줄이고 가격을 의미 있게 상승시킬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라며 “또한 중국의 수요가 점진적인 경제 재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부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현재 시장에서는 △중국의 경제 재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추가 생산량 조절 △러시아 원유 상한제에 따른 추가 공급 감소 등을 원유 가격의 변수로 보고 있다. 이 중 러시아와 관련 국제 에너지 기구(IEA)는 현재 1000만 배럴 수준인 러시아의 일일 생산량이 3월 께 하루 200만 배럴 가까이 줄어들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만약 중국 경제 재개로 수요가 살아나는 동시에 OPEC과 러시아의 공급이 추가로 줄어들 경우 원유 가격이 다시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수요가 붕괴 수준에 이르고 공급은 넘칠 수 있다는 시나리오도 나온다. 이는 내년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지면서 중국의 회복이 지연되는 와중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끝나는 경우다. 스탠다드 차타드의 수석전략가 에릭 로버트슨은 “만약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해결되면 (현재 원유 가격에 포함돼 있는) 위험 프리미엄이 사라져 가격이 50% 하락할 것”이라며 “지금 이어지는 원유 가격 하락 여파로 러시아가 내년 1분기 이후 전쟁 자금을 지원할 수 없어 휴전에 동의한다면 그동안 에너지 가격을 지지하는 위험 프리미엄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고 말했다. 로버트슨은 이 경우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 당 40달러 까지 낮아질 수 있다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