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의 작심 발언은 재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주인 없는 기업’이라고 불리는 KT와 포스코, KT&G, 신한·KB국민·우리·하나금융지주를 겨냥한 언급이었습니다. 이른바 ‘소유 분산 기업’ 얘기입니다.
주인 없는 기업의 주인은 국민연금(?)
소유분산기업이란 말이 낯설지만, 김태현 이사장이 그날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의도는 이렇습니다.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가 되었거나 막대한 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은 주인이라고 할 만한 주주가 없습니다. 단지 국민연금이 5~8% 가량 지분을 들고 있는 최대 주주이지만 경영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죠. 구체적으로 △KT 10.35% △포스코홀딩스 △신한금융지주 8.22% △KB금융지주 7.97% △우리금융지주 5.55% △하나금융지주 8.40% 모두 연금이 최대 주주입니다.
나머지는 재무적 투자자 등 여러 대주주로 나눠 갖고, 대부분 지분은 상장사이기 때문에 일반 소수주주들이 들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오너 기업과는 다른 지배구조 입니다. 통신·철강·금융 등 많은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국가 기간 산업에 속한 점도 특징입니다.
회장 연임 방조하는 지배구조 손 보겠다는 연금
김 이사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과거에 비해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다”고 운을 떼었습니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국민연금은 한진그룹 등 민간 기업 지배구조에 강력한 목소리를 냈죠. 재계의 반발은 상당했고요. 우파에 가까운 윤석열 정부는 관여가 적을 것으로 예상됐는데, 이를 깨려는 말 같습니다.
더 들어보죠.
“ESG(환경·사회·지배구조)에 대한 논의는 하지만 G( 지배구조)에 대한 관심은 소홀한 분위기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기준은 해외 기관투자자와도 기준이 다르고 보수적인데, 한 번 정해진 후에라도 주기적으로 보완해야 한다”
그는 구체적으로 소유가 분산된 기업에서 회장이 연임하는 현실을 지적했습니다.
“(소유분산기업에)회장을 중심으로 한 지배구조가 고착화되어 있고, 연임 과정에서 쟁점이 발생하는 데 이는 지배구조 기준이 명확히 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금융지주 등이 건강한 지배구조를 구축하고 이사회 기능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 것인지 논의가 활발히 이뤄져야 하는 게 아닌가 (회장 선임 시 내부자를 우선하는)규정이나 후계자 양성 시 사회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원칙이 정립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김 이사장은 강력한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통해 소유분산 기업의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CIO(기금운용본부장)에게 스튜어드십 코드 강화에 대해 요구하겠다”
그가 이 같은 경고를 보낸 날 마침 신한금융지주 회장 선임에서 예상을 깨고 조용병 현 회장이 용퇴했습니다. 세대교체를 위해 스스로 물러난 모양새지만, 조 회장은 직전까지 3연임을 전제로 경영 계획을 세웠던 터라 현 정부의 부정적인 기류가 반영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많았습니다.
공적 책임 강조하는 ‘관(官)의 시선’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는 지난 정부 국민연금에서 한진그룹에 주주활동을 했던 근거입니다. 국민의 노후자금을 맡아 운용하는 국민연금을 집사 혹은 수탁자(Stewardship)로 보고 책무를 강화하는 단어입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대부분의 해외 연기금이나 국부펀드, 민간 자산운용사에서도 채택하는 개념입니다. 주주로서 투자 기업을 견제해야 기업이 소수 오너의 이익 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기업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지난 정부에서는 이런 개념을 민간 오너 기업에, 이번 정부는 공적 성격이 있는 주인 없는 기업에 적용하겠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김태현 이사장은 금융위원회 관료 출신입니다. 그의 선배 관료들은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관치(官治)가 없으면 정치(政治), 정치가 없으면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의 내치(內治)가 된다”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이라고 말했었죠.
이들의 선의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국민 생활에 밀접하고 사실상 국민이 최대 주주인 기업에서 회장을 비롯한 몇몇 인사가 내부 정치로 일종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겠다는 생각 입니다. 이들 기업이 정부 정책에 호응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죠. 김 이사장이 언급한 기업 대부분은 현재 기존 회장이 기업 내부는 물론, 정부·정치권을 상대로 연임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있다고 합니다. 김 이사장의 언급 이후 이들의 거취가 어떻게 될지 주목됩니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순수하게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관치의 수단으로 이용하겠다는 것인지 지켜봐야 할 듯 합니다. 그 동안 관치의 결과 외풍으로 회장이 들어서면 눈치를 보느라 장기적인 기업 성장을 도모하기 어렵고, 전임자의 정책을 모두 부정하는 폐해가 일어나곤 했습니다.
지금도 일부 금융지주에는 전직 관료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전현직 인사가 전직 관료나 청와대 관계자를 통해 로비를 한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이들 중 한 사람이 회장이 된다면, 과연 선의의 관치가 될지 업계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임세원 기자 why@sedaily.com, 김선영 기자 earthgir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