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체의 여인이 늑대의 배를 가르고 걸어나왔다. 그녀의 왼쪽 발은 여전히 버둥거리는 늑대의 뱃속에 있다. 독일 태생의 미국 현대미술가 키키 스미스(68)의 2001년작 ‘황홀(Rapture)’이다. 종교·신화·문학 속 여성을 소재로 택하는 작가가 ‘빨간 망토’ 우화에서 착안한 것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동화에서는 사냥꾼이 늑대 배를 갈라준 덕에 주인공 빨간 망토가 탈출했지만 키키 스미스는 소녀가 아닌 성인 여성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뚫고 나온 것으로 표현했다. 새로운 여성상의 탄생이다. 르네상스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이 거대한 조개껍질에 담겨 바람의 신이 이끄는 대로 우리 앞에 온 ‘수동적’ 여신이었다면, 키키 스미스의 여성은 ‘주체적’이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처럼 부끄러운 듯 몸을 가리지도 않는다. 축 처진 몸뚱이도 당당하다. 그녀를 삼켰던 늑대는 로마의 건국 신화에서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젖 먹여 키운 늑대를 떠올리게 한다. 남성 중심으로 전개돼 온 서양사 전반에 대한 도전으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키키 스미스의 아시아 최대 개인전
1980~90년대 미국 미술을 이야기하면서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작가, 타임지가 ‘세계를 움직이는 인물 100명’(2006년) 중 하나로 꼽은 미술가 키키 스미스의 국내 최대 규모 개인전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개막했다. 작가의 40여 년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140점 작품을 세계 각지에서 모았으니, 아시아에서 열린 그의 최대 전시이기도 하다.
전시 제목 ‘자유 낙하’는 키키의 1994년작에서 따왔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듯한 여성의 웅크린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실제 작가를 촬영한 사진을 금속판에 옮겨 찍은 판화다. 작가의 실제 몸 크기와 비슷하며, 접어서 손에 잡히는 책 형태로 만든 일종의 ‘아티스트북’이다. 자화상이자, 예술가로서의 의지를 보여주는 선언문 같은 작품이다. 마흔이던 그 해, 뉴욕 최고 화랑 중 페이스갤러리 전속작가로 합류하면서 품은 작가로서의 마음가짐을 담고 있다. 뉴욕에 거주하며 온라인으로 전시 개막 기자간담회에 참여한 작가는 “당시 갤러리 소속의 작가 중 가장 어린 축이었던 나는 ‘(선배인) 이 분들은 20년 넘게 ‘자유낙하’를 하고도, 그러고도 견디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자기 자신과 자기 작업에 대한 믿음으로, 그것이 어디로 자신을 데려가는지 두려움 없이 살고 있었던 것이라 믿었고,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업했다”고 말했다. 미술관 측은 이 ‘자유낙하’를 “키키 스미스 작품에 내재한 분출하고 생동하는 에너지를 함의하며, 이는 작가의 지난 40여 년에 걸친 방대한 매체와 작품 활동을 한데 묶는 연결점으로 기능한다”는 뜻에서 전시 제목으로 택했다.
■귀 기울이게 하는 상생의 메시지
키키 스미스는 유명한 미니멀리즘 조각가 토니 스미스(1912~1980)와 오페라 배우 제인 로렌스(1915~2005)를 부모로 뒀다. 마크 로스코, 잭슨 폴락 같은 추상표현주의자와 교류하며 1960년대를 풍미한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자연스럽게 미술을 경험했다. 고졸이며, 정규 미술교육을 배운 적 없지만 그 어떤 미술전공자보다도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경건하다. 해부학에 대한 호기심이 인간의 신체에 대한 관심으로, 작가의 길로 이끌었다. 존경하는 아버지와 사랑하는 여동생을 연달아 잃은 후에는 그 연약함을 다시 보게 됐다. 피·오줌 등 인간의 분비물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기도 했고, 피부를 벗겨내 인종·성별·나이도 가늠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자신의 몸을 그대로 본 따 제작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여성주의 미술가이면서도 벌거벗은 채 박쥐·나비·거북 등으로 위장(?)한 콜라주와 사진 작업 등을 통해 인간 뿐만 아닌 자연 전체에 대한 포용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비교적 최근작인 타피스트리 작품은 거대한 카페트에 신화적 장면을 담아 보여준다. 보드랍고 따뜻하면서도 황홀하다. 내년 3월1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