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노인이 폼 나게 사는 사회

◆정민정 논설위원

노인 빈곤율 43.4%로 OECD 3배

생산가능 인구의 부양인구도 급증

소득 공백 메울 양질 일자리 만들고

'더 내고 늦게 받는' 연금개혁 시급

정민정 논설위원정민정 논설위원




지난 주말 마을버스에서 어르신 한 분이 또 다른 어르신에게 연신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자리를 양보해줬다는 이유에서다. 자리를 양보한 할아버지는 “어르신, 괜찮습니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거동이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괜찮아요. 내가 아직 백 살도 안 됐어요. 아흔다섯 살밖에 되지 않아요”라며 해맑게 웃었다. 할아버지는 “저는 아직 애네요. 저는 내일모레면 여든 살이 됩니다”라고 답했다. 두 어르신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승객들은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표정이 역력했다. 기분 좋은 온기가 마을버스 안을 가득 채웠다. 딸아이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우리 동네 장수 마을로 지정해도 되겠다. 저렇게 건강한 어르신들이 많으니.”

하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오래 사는 게 축복만은 아니다. 건강한 육체와 적정한 소득, 그리고 안정된 일자리가 있어야 한다. 병들고 가난한 노인에게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 삶’은 지옥이다. 65세 이상 우리나라 노인의 빈곤율은 43.4%(2021년 기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평균(13.1%)보다 세 배 이상 높다. 75세 이상 노인은 55.1%가 빈곤 상태였다. OECD 회원국 가운데 75세 이상 노인 절반 이상이 빈곤 상태인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다. 생계형 범죄에 내몰려 ‘현대판 장발장’으로 전락한 노인도 적지 않다. 세계 최고 수준의 노인 자살률은 이 땅에서 노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말해준다.



노후를 책임진 국민연금은 빈사 직전이다. 현행 보험료율을 유지할 경우 2057년이면 연금 재정이 고갈된다. 이마저도 평균 60만 원도 안 돼 ‘용돈 연금’이라는 비아냥이 나온다. 설상가상 급격한 고령화로 생산가능인구 100명이 부양해야 할 65세 이상 노인은 올해 24.6명에서 2060년 91.1명까지 늘어난다. 일하는 사람 한 명이 노인 한 명을 먹여 살려야 한다.

관련기사



반면 해외 선진국 노인들은 상대적으로 풍족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노후 보장과 재정 안정성이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연금을 개혁한 덕분이다. 우리 역시 역대 정부마다 국민연금 개혁을 외쳤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그런 면에서 최근 정부가 국민연금 개혁 논의에 착수한 것은 바람직하다. 핵심은 보험료율 인상이다. 현행 9%인 보험료율을 2025년부터 점진적으로 인상해 2036년 15%까지 올리자는 것이다. 현행 62세에서 2033년까지 65세로 상향하는 ‘수급 개시 연령’을 2048년 68세까지 높이자는 의견도 제시됐다. ‘더 내고 더 늦게 받는’ 개혁이다.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연금 수령이 늦어지는 만큼 소득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더 오래 일해야 한다. 나이와 경험, 숙련도 등을 고려해 양질의 민간 일자리와 시간제 공공일자리 투 트랙으로 접근해야 한다. 인구 절벽으로 노동력이 크게 부족해지는 만큼 숙련된 노인 등 잠재 인구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최근 중소기업에서 정년이 지난 직원을 계약직 형태로 재고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일할 사람이 없어 애태우는 농촌에도 건강한 노인의 일손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연령을 기준으로 고용했던 과거 방식을 버리고 정년 폐지로 가는 방향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외국에 나가보니 노인들의 옷차림이 깔끔하고 점잖은 게 눈에 확 들어와 적잖이 놀랐다고 했다.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도 선진국의 기준으로 ‘노인이 폼 나게 사는 사회’와 ‘시골과 도시의 격차가 없는 나라’를 꼽았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나이 듦이 재앙이 아닌 축복이 되려면 온 나라가 마음을 모아야 한다. 며칠 있으면 우리들도 나이를 한 살씩 더 먹는다.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노인의 삶을 향해 가고 있는 셈이다. ‘103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100년을 살아보니 65~90세 때 가장 좋았다”고 했다. ‘노인이 폼 나게 사는 사회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세밑 한파에도 마음 한구석이 훈훈해진다.

정민정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