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역사속 오늘]혐오와 차별의 상징이 된 드레퓌스

최호근 고려대 사학과 교수

1894년 12월 22일






1894년 12월 22일. 프랑스 군사법원은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드레퓌스를 숙적 독일에 군사기밀을 제공한 반역자로 적시했다. 드레퓌스는 군적이 박탈되고 프랑스령 기아나의 섬으로 유배됐다. 2년 후 진범이 적발됐지만 사태는 시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진범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석방됐다. 군부가 책임 회피를 위해 진실 감추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더 큰 이유는 반(反)유대주의 정서였다. 드레퓌스는 독일계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국민의 공적이 되기에 가장 적합했다. 인종주의와 애국주의가 팽배했던 그 시절 대중에 중요한 것은 사실관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사건의 전말이 보도되자 상식이 다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작가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으로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도발의 대가로 졸라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비판적 지식인들의 행동이 시작됐다. 세계의 언론도 프랑스 정부와 군부의 처사를 비판했다. 와중에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몰기 위해 문서 조작에 가담했던 군 장교가 감방에서 자살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고등법원이 재심에 착수했다. 1899년 9월 드레퓌스에게 10년형이 선고됐다. 10일 후 대통령의 사면이 발표됐지만 복권은 미뤄졌다. 긴 싸움 끝에 1906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됐고 드레퓌스는 군에 복직했다. 진실이 회복되기까지 12년이 걸렸지만 반대파는 드레퓌스가 유죄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 사건이 지금까지 주목받는 것은 선입견과 편견, 혐오와 차별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개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드레퓌스를 반역자로 몰아갔던 반유대주의는 한 세대 후 독일 땅에서 유대인 학살로 재연됐다. 진실보다 진영 논리에 집착하는 곳이라면 드레퓌스 사건은 얼마든지 재발할 수 있다. 그 경우에는 내가 드레퓌스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가 바로 지금 여기서 혐오와 차별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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