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마지막 날인 지난 2022년 8월15일.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 112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교제 중인 여성을 홧김에 살해했다”는 A(46)씨의 신고 전화였다. 경찰은 경북 구미의 한 모텔로 출동해 술에 취해 있던 A씨를 살인 혐의로 현장에서 긴급 체포했다.
사건 현장인 모텔 객실은 유혈이 낭자했다. 부검 결과, 피해자는 5시간 여 전 목 부위에 상처를 입고 과다출혈로 숨졌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교제 중이던 피해자로부터 자녀가 있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 우발적으로 공업용 커터칼로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사건은 우발적 단순 살인 사건으로 종결되는 듯 싶었다. 하지만 변사체를 직접 검시한 검찰은 시신에 방어흔이 없다는 점을 주목했다. 현장에서 피해자의 현금도 발견되지 않았다. 50대인 피해자의 나이와 교제 기간 등을 봤을 때 살해동기를 숨겨둔 자녀 문제로 보기에도 석연찮은 구석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검찰은 A씨의 휴대전화 포렌식을 통해 피해자와의 금전 관계를 다시 들여봐달라며 경찰에 보완수사를 요구했다.
문제는 초기 수사에서 A씨의 휴대전화를 확보하는 못했다는 점이었다. A씨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범행 직후 휴대전화를 버렸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A씨의 112 신고도 유흥업소 직원의 휴대전화로 이뤄졌다. 현장감식에서도 A씨의 휴대전화는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경찰은 사건을 연인 간 다툼에 의한 우발적 살인으로 보고 A씨를 살인 혐의로 검찰에 구속 송치했다.
반면 검찰의 판단은 달랐다. 검찰은 사건 해결을 위해선 A씨의 휴대전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경찰에 재차 보완수사를 요구했다. 단서는 사건 현장을 촬영한 사진 속에서 나왔다. 객실 안을 촬영한 사진 속에는 휴대전화로 보이는 물체가 포착됐고, 청소업체를 통해 모텔업주가 A씨의 휴대전화를 분실물로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검찰은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확보한 A씨의 휴대전화를 대구지검 포렌식센터에 분석 의뢰했다.
문자메시지, 통화 내역 등 분석한 결과 A씨는 오래 전부터 피해자에게 자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장기간 각종 채무 독촉에 시달려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상태에서 A씨와 교제해온 사실도 드러났다. 강도행각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인 피해자의 휴대전화 케이스 속에 들어있던 현금이 사라진 사실도 확인됐다.
검찰 수사결과 피해자와 동거 중인 A씨는 피해자의 돈으로 생활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범행 당일에도 피해자가 A씨에게 빌려준 40만원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과정에서 다툼이 시작됐고, 살해 후 피해자의 휴대전화 케이스에 들어 있던 현금까지 가로챈 것으로 조사됐다. 자수 당시 A씨는 피해자로부터 빼앗은 돈을 유흥비로 모두 탕진한 상태였다.
사건을 담당한 대구지검 김천지청 양준열 검사는 “포렌식센터 분석관들이 심하게 파손된 상태로 발견된 A씨의 휴대전화를 어렵게 복구하는데 성공했다”며 “통신영장과 대검찰청 디지털수사망(D-NET) 통화내역 분석 프로그램을 통해 범행 직전 A씨 동선을 추적해 범행 동기가 자녀가 아닌 금전적인 문제였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범행 직후 A씨의 행적을 조사해 피해액을 특정하고 A씨를 단순 살인이 아닌 강도살인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A씨는 1심 재판에서 징역 20년에 전자장치부착명령 10년을 선고받고 항소심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