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반대로 14년째 표류 중인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도입이 새 국면을 맞았다. 여당이 입법 강행 의사를 밝히며 드라이브를 거는 가운데 한의사 단체가 돌연 찬성으로 돌아서며 공고했던 의료계 연대에 균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정부, 소비자, 보험업계 등이 청구 간소화를 원하는 가운데 양방 의료계만 유일한 반대 입장이어서 입지가 크게 좁아진 상태다.
31일 보험업계와 의료계 등에 따르면 소비자들의 숙원이었던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올해 실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보험 가입자가 보험금을 받기 위해 관련 자료를 의료기관에 요청하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전산망을 통해 보험업계로 바로 전송하는 방식이어서 소비자 편의성이 크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2020년 기준 전 국민의 80%(4138만 명)가 가입해 ‘제2의 건강보험’으로 불리는 실손보험은 보험금 청구 절차가 까다로워 소비자들의 불만이 크다. 실손보험 가입자가 보험금을 지급받으려면 병원을 직접 방문해 진료 영수증, 진단서, 진료 세부내역서 등의 문서를 발급받아 보험사에 제출해야 한다. 이런 번거로움 때문에 보험금 청구를 포기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소비자단체가 지난 2021년 실손보험 가입자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47.2%가 '지난 2년간 청구를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병원을 방문할 시간이 부족했다’, ‘증빙서류를 보내는 게 귀찮았기 때문’ 등이 이유로 꼽혔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국민권익위원회가 2009년 보험사별로 달랐던 보험금 청구 양식을 통일하고, 방법도 더 간단하게 바꿔야 한다고 권고한 이후 관련 법안이 수차례 국회에 발의됐지만 번번이 의료계의 반대에 부딪혀 진척이 없었다. 대한의사협회를 필두로 대한한의사협회·대한약사회·대한병원협회·대한치과의사협회 등 5개 단체가 "민감한 개인 진료기록을 민간 보험사에 넘기면 결국 국민들에게 불이익을 초래할 것"이라며 한 목소리를 내왔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25일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이 "의료계가 거부한다면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입법으로 처리하겠다"고 밝히자, 이틀 뒤인 27일 한의협이 돌연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 도입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울러 관련 전산체계 구축 및 운영 관련 사무를 심사평가원에 위탁하는 방안도 적절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공고해 보이던 의료계 공조에 금이 간 점이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나온다. 반면 의협 등 나머지 의료계 단체는 여전히 같은 이유로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보험업계는 한의협의 입장 선회에 대해 한의 비급여 행위를 실손보험 보장에 포함시켜 실익을 챙기려는 계산이 깔린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한의 비급여는 1세대 일부 실손보험에서만 보장하고 있다. 한의협 관계자는 "한약, 약침, 한의 물리치료 등에 실손보험이 적용된다면 국민 건강추구권과 의료선택권이 확대될 것"이라며 "한의 비급여의 실손보험 보장을 위해 금융당국과 보험업계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촉구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