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일 금요일 오후 4시 48분 서울 서초구 남부터미널역 지하 3층. 퇴근 시간을 한 시간여 앞둔 한산한 역사를 지나 시계와 금·은, 보석류를 파는 국제전자센터가 있는 동남쪽 방향으로 약 100m를 걷자 공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전펜스가 나타났다. 이를 지나쳐 내부 공간을 지난 뒤 계단으로 한 층을 올라서자 녹색 식물과 이를 밝히는 보랏빛 불빛으로 가득 찬 공간이 나타났다. 남부터미널 지하 2층에 있는 ‘인도어팜(실내 식물 재배 시설) 플랜트’다.
서울 지하철 3호선이 정차하는 남부터미널역 지하에서는 식물이 자란다. 주로 샐러드나 쌈채소로 쓰이는 카이피라·크리스피아노·바질 등이 발광다이오드(LED) 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며 생장한다. 식물 생장에 필요한 것은 빛을 비롯해 적절한 온도·물·영양분 등. 남부터미널에서는 이 같은 조건을 모두 첨단 기술로, 작물별로 다르게 만들어낸다. 카이피라와 바질은 최적 LED 빛 파장·세기, 온·습도, 영양분이 모두 다르다. 이들을 정보통신기술(ICT)을 통해 자동으로 조절해 최적화하는 것이 남부터미널 인도어팜의 특징이다.
이 공간 관리를 맡고 있는 송다영 넥스트온 파트장의 안내를 따라 내부를 둘러봤다. 식물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양액을 제조·관리하는 수조 통이 놓인 곳을 제외하고는 어림잡아 500평에 달하는 공간의 대부분이 수직 6단짜리 철제 프레임으로 차있었다. 이 프레임 한 단에는 식물을 가로로 21모, 세로로 6모까지 심을 수 있다. 한 단에 들어가는 작물 수는 126모인 것인데 이를 수직으로 여섯 번 겹쳐 쌓았으니 한 개의 프레임에 들어가는 작물 수는 756모다. 이곳에는 이 같은 프레임 75개가 있다. 5만 6700모의 채소를 생산해낼 수 있는 공간인 셈이다.
지하철 역사에서 식물이 자란다고 하면 지하철이 내는 소음과 텁텁한 공기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인도어팜은 마치 식품을 가공하는 공장과 같이 청결하게 유지된다. 외부에서 인도어팜에 들어가려면 에어샤워 부스를 통과해야 하며, 그 전에는 하얀색 방진복을 입고 있는 옷 위에 걸친다. 내부 공기는 청정하게 유지되고 식물에 공급되는 물 또한 청결하게 관리된다. 생장 조건을 기술적으로 완벽에 가깝게 유지하다보니 이곳에서 키우는 작물에는 농약을 칠 필요가 없다. 웬만한 유기농 작물보다 친환경적이다.
송 파트장이 따서 내어준 카이피라, 크리스피아노, 바질을 직접 먹어봤다. 아삭한 식감과 함께 강한 허브향이 느껴졌다. 남부터미널역 인도어팜에서 자라는 채소는 현재 다수의 인근 프랜차이즈 식당에 샐러드용으로, 쌈채소용으로 공급되고 있다고 한다. 이전에는 신선식품 배송 서비스 컬리에 납품되기도 했다. B2B(기업 대 기업)로 장기간 공급을 했으니 맛, 청결 조건, 지속적인 생산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송 파트장은 “각 작물에 최적화된 조건을 균일하게 유지해 키우다보니 채소 향이 강하고 식감이 살아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인도어팜이 있는 남부터미널역 동남쪽 역사 지하 1~3층은 2002년까지는 백화점 아래의 지하상가로 쓰였다. 백화점 운영 업체가 부도를 맞이하자 지하상가는 서울시에 기부채납됐다. 이후 17년 동안 방치됐다가 2019년 넥스트온이라는 국내 스마트팜 업체가 도시농업사업자로 선정되며 인도어팜으로 전환됐다. 현재 이 공간을 개·보수 중인 넥스트온은 지하 2층을 인도어팜으로 유지하고 지하 1·3층은 지하 2층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바로 소비·체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밀 예정이다.
尹 대통령 관심…'식량 안보' 위기 중동 6개국에 수출까지
#남부터미널역 인도어팜을 찾기 하루 전인 2월 23일 오전 서울 청와대 영빈관.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등 정부 핵심 관계자들과 업계 최고경영자(CEO)들이 한자리에 모여 비공개로 ‘제4차 수출전략회의’를 열었다. 각 부처 장관들과 CEO들이 차례로 나서 수출 확대 전략과 사업 계획 발표를 이어나가던 중 한 중소기업 대표가 프레젠테이션(PT)에 나섰다. 주인공은 최재빈 넥스트온 대표. 삼성물산·LG에너지솔루션 등 대기업 CEO들 사이에서 그는 이날 개별 기업 대표 PT에 할당된 2분 30초를 훌쩍 넘겨 무려 7분여 동안 PT를 이어갔다. 정부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중기부와 농식품부가 합심해 수출을 지원하라’며 넥스트온의 뛰어난 기술력과 아이디어에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인도어팜 플랜트 산업은 농업의 관점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LED반도체, ICT, 데이터 분석 기술이 융합돼야 한다는 내용을 말씀 드렸습니다. 상품화가 가능한 수준의 농작물을 실내에서 재배하려면 수많은 분야의 엔지니어링 기술이 결합돼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융합 인재 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발표했죠. 주어진 시간을 훌쩍 넘겨 걱정을 많이 했지만 PT가 끝난 후 오히려 정부 관계자들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응원을 해줘서 힘이 났습니다.”
최 대표는 2월 24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23일 열렸던 ‘제4차 수출전략회의’의 현장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넥스트온은 2017년 설립돼 현재 직원이 70명인 중소기업이지만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한다. 농작물 광합성을 극대화시키는 LED반도체 기술을 자체 개발했고 온·습도를 각 작물에 알맞게 조절하고 물을 자동으로 공급하는 ICT도 개발했다. 현재 LED반도체·ICD·농화학 등과 관련해 보유한 특허만 50개가 넘는다. 최 대표는 “인도어팜은 태양광이 없는 실내에서 LED반도체를 활용해 식물 광합성을 이끌어내고 온·습도 공조 시설, ICT, 수처리 시설 등 융·복합 기술·시설을 활용한다”며 “기후와 병충해에 민감한 작물을 대량 생산하려면 최고 수준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도어팜은 365일·24시간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어 노지에서 연간 4모작을 할 수 있는 상추를 최대 17모작까지 할 수 있다. 재배 시설을 수직으로 쌓아 올리면 면적당 생산량 극대화도 가능하다. 넥스트온이 국내에 운영 중인 서울 남부터미널과 충북 옥천 사업장의 재배 시설은 각각 6단·12단으로 구성돼 있다. 이론적으로는 높이 제한이 없다면 무제한 생산이 가능한 셈이다. 이외에도 강원 태백에 새로운 인도어팜을 건설 중인데 이는 이달 중 준공될 예정이다.
세계 최대 터널형 인도어팜인 옥천 사업장은 세계 최초로 딸기 생산에 성공해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CNN·AP 등 주요 외신에 보도될 정도로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최 대표는 “플랜트 규모가 커질수록 온·습도 등 생장 조건을 균일하게 유지하는 것이 어렵고 초기 투입 비용이 커 상품화를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하다”며 “채소류는 비교적 쉽게 생산할 수 있지만 한국산 딸기처럼 기후와 병충해에 민감한 작물을 대량으로 지속 생산하려면 고도의 기술력이 접목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 대표의 시선은 국내가 아닌 세계로 향해 있다. 넥스트온은 산업부 등 정부 지원을 통해 올해 1월 이뤄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정상 방문 일정에 경제사절단으로 참가했다. 2020년에는 중기부에 의해 ‘차기 유니콘(기업가치 1조 원 이상 스타트업)’으로 선정돼 정책·금융 지원을 받았다.
정부 지원을 토대로 꾸준히 해외 시장을 두드린 결과 중동 6개국에 4억 달러 규모의 수출을 눈앞에 두는 성과도 얻게 됐다. 최 대표는 “UAE·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쿠웨이트·오만·바레인 등 중동 6개국과의 인도어팜 플랜트 수출 협상이 최종 단계에 있다”며 “현재 세부 계약 사항을 협의하고 있으며 잠정 수출 규모는 4억 달러 수준”이라고 밝혔다. 넥스트온이 지난해 10월 쿠웨이트 대형 투자사인 ‘마와리드홀딩스’와 사우디 리야드에 공동 설립한 합작회사(JV) ‘넥스트온미나’를 통해 중동 현지에 인도어팜 플랜트를 공급하는 방식이다. 넥스트온은 플랜트당 평균 2700만 달러(약 356억 원) 규모의 인도어팜을 순차적으로 10개 이상 구축해 운영할 계획이다.
최 대표는 “중동 지역은 고온·저습해 야외에서 농작물을 재배하기 힘든 기후를 가졌다”며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글로벌 공급망 문제로 식량안보 위기를 겪으면서 인도어팜 산업에 대한 중동 국가들의 관심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중동 외에 캐나다·싱가포르·홍콩 등과도 수출 협상을 벌이고 있어 조만간 추가 수출 계약을 체결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어 “국내 시장은 생산 난도가 높은 품종을 대형 실내 플랜트에서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능력을 검증하는 테스트베드”라며 “최종 목표는 해외에 대형 플랜트를 대량으로 짓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