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색채로 바디 페인팅한 퍼포머들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다. 옷을 입지 않았으나 파랑, 초록과 주황색이 뒤섞인 바디 페인팅 때문에 살색이 드러나는 부분은 거의 없다. 이들은 흰 벽에 몸을 문질러 흔적을 남기거나, 걷다가 멈춰서고 무릎 꿇기도 한다. 세계 미술계의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신예 도나 후앙카(43)는 이들을 ‘살아있는 조각’으로 여긴다. 그는 바디페인팅한 퍼포머의 신체를 확대해 찍은 사진에서 자신의 회화 작업을 시작한다. 이 사진을 캔버스에 인쇄해 밑그림으로 사용한다. 과도한 확대는 인체와 물감의 흔적들을 압도한다. 원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추상화처럼 표현된다. 후앙카는 여러 안료에 흙과 같은 자연 소재를 섞어 자신만의 물감을 만든다. 붓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만 칠한다.
도나 후앙카의 국내 첫 개인전 ‘블리스 풀(Bliss Pool)’이 코오롱그룹이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서 운영하는 미술관 스페이스K에서 9일 개막했다. 12일까지 처음 나흘 동안만 퍼포먼스가 함께 진행됐다. 이후에는 시간을 기록한 회화와 설치작업, 향과 소리가 남은 오감형 전시가 6월 8일까지 계속된다.
후앙카의 삶은 시작부터 충돌이었다. 다른 별에 떨어진 별똥별처럼. 미국 시카고에서 볼리비아 이민자 부모의 딸로 태어났다. 집 밖에서는 미국인이었지만, 집 안에서는 볼리비아의 신화를 들으며 자랐다. 휴스턴대와 스코히건미술학교에서 공부했지만 미술가가 아닌 뮤지션이 됐다.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에서 밴드 드러머로 이름을 먼저 알렸다. 남성 중심의 미술계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이다. 바디페인팅을 시작하면서, 고유의 자유로움과 즉흥성에 매료돼 생각이 바뀌었다. 퍼포먼스와 결합된 독특한 추상회화가 탄생했다. 2017년 아트바젤 언리미티드에 소개되면서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2021년에는 루이비통의 핸드백 콜라보레이션 ‘아티카퓌신’ 프로젝트에도 초청받았다
‘이브 클랭 블루(IKB)’로 유명한 프랑스 미술가 이브 클랭(1928~1962)이 여성 모델의 몸에 푸른 물감을 묻힌 후 자신의 지시에 따라 눕고 구르게 하는 방식으로 작업한 것과 종종 비교된다. 이브 클랭은 여성의 몸을 ‘도구’로 삼았지만 후앙카는 여성의 몸을 ‘수행하는 주체’로 대한다. 후앙카가 페미니즘 예술가로 불리는 이유다. “천천히 걸으라”는 지시만 할 뿐 나머지는 퍼포머들의 몫이다. 작가는 결과물보다 움직임이 있었던 그 시간과 찰나에 집중한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 전시가 열리는 공간의 의미까지 중시한다. 후앙카는 구불구불 곡선으로 이뤄졌고 날씨와 빛에 따라 분위기를 시시각각 바꿔가는 스페이스K를 직접 방문한 후 전시 내용을 결정했다. 파랑과 주황 등 생동감 넘치는 색으로 완성한 3m 높이의 회화 16점이, 높이 7m와 3m의 곡면 벽에 설치됐다. 강렬한 작품이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에 안긴 것 같은 신비감을 전한다.
전시장 안에서는 나무 태운 듯한 향과 물 흐르는 것 같은 소리가 감지된다. “소리와 향은 고정된 이미지로 기록할 수 없고, 고정된 이미지인 회화에 표식을 남기고자 소리와 향을 사용한다”는 작가는 후각과 청각이 인식과 기억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번 전시에는 남미 지역에 서식하는 팔로산토 나무와 태운 머리카락을 향에 혼합했다. 끊임없이 흐르는 소리는 얼었다 녹고 기화하는 물의 순환을 담고 있다. 온몸으로 경험해야 하는 전시이기에 “핸드폰을 잠시 내려놓고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고 작가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