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서 뉴욕·스위스까지…2008년 악몽 재현되나
지난 10일(현지 시각) 총자산 276조5000억원인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재정 위기가 드러난 지 이틀 만에 파산했습니다. 이어 뉴욕 소재 가상화폐 전문 은행 시그니처 은행도 붕괴했습니다. 이에 미국 테크 업계와 가상 화폐 시장은 패닉에 빠졌습니다. 2008년 리먼 사태의 악몽이 재현 되는 것 아닌가는 공포가 시장을 휩쓸었습니다. 이미 불씨는 번지고 있습니다. 스위스 2대 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CS)도 유동성 위기에 빠진 상황입니다.
CS는 수년 전 영국의 핀테크 업체 그린실캐피털에 총 100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조성해 대출을 지원했다가 20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입었고 아케고스캐피털에도 투자했다가 50억 달러가량의 손실을 봤습니다. 여기에 지난 수년간 탈세 혐의로 미 의회와 법무부의 조사를 받고 불가리아에서 범죄 자금을 세탁했다는 혐의를 받으면서 고객들이 발길을 돌렸습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CS의 예금액은 지난해 1분기 4325억 달러에서 지난해 말 2530억 달러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자산 규모도 같은 기간 8020억 달러에서 지난해 말 5830억 달러로 27% 감소했습니다.
SVB는 실리콘밸리 새너제이에서 스타트업의 예금을 유치하며 스타트업의 은행으로 성장했습니다. 2500개 이상의 벤처캐피털(VC)와 헬스케어·테크 스타트업 중 44%를 고객으로 확보했습니다. CS는 더 전 세계 부자들이 돈을 맡기는 금고 역할을 하는 스위스에서도 가장 큰 은행 중 하나입니다. 운용자산이 1780조원으로 SVB의 7배, 세계 26위 규모입니다. 이 때문에 CS마저 무너지면 제2의 리먼 사태를 맞는다는 악몽이 시장에 퍼지고 있습니다. 파이낸셜타임즈(FT)에서는 스위스 투자은행 UBS가 위기설로 궁지에 몰린 CS 인수를 위해 현재 협상을 진행 중이라는 소식마저 나왔습니다.
국내 시장은 ‘불안한 안정세’…미국·유럽상황에 촉각
국내 금융시장은 지난 한 주 간 미국·유럽 시장의 불안이 국내까지 번지는지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아직 우리나라와 국내은행의 대외 신용도는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내은행의 경우 파산한 SVB와 달리 금리인상기에 타격이 큰 유가증권의 비중이 낮고, 구조적으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가능성도 높지 않기 때문입니다.
금융투자업계 등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발행하는 외국환평형기금채권 5년물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16일 기준 42.58bp(1bp=0.01%포인트)로 안정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CDS는 채권을 발행한 국가나 기업이 부도났을 때 손실을 보상해주는 일종의 보험 성격의 금융파생상품입니다. 경제 위험이 커지면 통상 프리미엄도 올라가기 때문에 국가와 기업의 부도 위험도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우리나라 CDS 프리미엄은 SVB 파산 직전인 지난 7일(41.15bp)에 비해선 다소 높아졌지만 지난해 11월 미국 긴축 공포에 74.98bp까지 올라갔던 것과 비교하면 여전히 낮은 수준입니다. 반면 미국의 CDS 프리미엄은 16일 42.52bp까지 오르며 급등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난해 3월만 해도 13bp 수준에 불과했으나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고강도 긴축 통화정책 이후 꾸준히 상승하다가 이번 SVB 파산 사태로 오름폭이 더 가팔라졌습니다.
은행권도 KB국민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 하나은행의 CDS 프리미엄이 이달 초와 비슷한 수준인 반면 JP모건 등 미국 대형은행의 CDS 프리미엄은 지난해 10월 이후 최고치로 치솟았고, 위기설에 휩싸였던 CS그룹 역시 급등락이 이어지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환율 역시 지난 한주 안정세를 보였습니다. 은행권의 유동성 위기와 이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인상에 제동을 걸 수 있다는 기대가 뒤섞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태 진전 추이에 따라 향후 변동성이 확대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지적입니다. 특히 전문가들은 정부가 시장에 대한 모니터링뿐 아니라 우리 경제의 잠재 폭탄으로 꼽히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가계부채, 가상화폐 등의 시장에서 선제 정책 대응을 주문했습니다. 김창규 다올인베스트먼트 대표는 “핀테크가 발달한 현 시점에서 뱅크런이 하나 터지면 번지는 속도가 어마어마하다”며 “SVB가 파산하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주말 와중에도 SVB 예금 전액 보증을 발표한 것처럼 우리 역시 시장 불안을 막기 위해 지급 보증 등의 대책을 선제적으로 내놓아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정부, 은행권에 건전성 강화 주문…예금보호한도 올라가나
우리 금융당국은 국내 은행권에 ‘방화벽’을 더 높이 쌓으라고 주문하고 나섰습니다. 당초 은행권 경영 및 관행 제도 개선 차원에서 위기 대응 강화 방안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SVB 파산, CS 위기설 등 글로벌 금융위기 가능성이 제기됨에 따라 더욱 강력한 자본건전성 확충 대책 마련이 필요해졌기 때문입니다. 또 국내 금융지주와 은행 경영진에 보수 결정 과정에 주주가 직접 참여하고, 금리 인상기 예대마진 확대에 따른 이익 성장 등 경영성과와 무관한 성과급이 지급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도 도입됩니다.
국내 은행이 연내 적립해야하는 ‘경기대응완충자본(CCyB)’은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바젤은행감독위원회가 회원국에 권고한 규제로, 경기가 호황일 때 은행들에게 위험가중자산의 최대 2.5%까지 보통주 자본을 추가 적립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2016년 제도 도입 이후에도 6년째 적립률이 0%입니다. 금융위는 금융위원회 의결을 거쳐 추가자본 적립 의무를 부과하고, 향후 경기가 나빠질 경우 적립한 자본으로 건전성을 유지하고 실물 부문에도 자금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은행별 손실흡수능력 스트레스테스트 결과에 따라 추가자본 적립 의무를 부과하는 ‘스트레스 완충자본 제도 도입’도 은행업 감독규정 개정을 통해 추진키로 했습니다. 현재도 스트레스테스트를 실시해 손실흡수능력을 점검하고 있으나, 추가자본 적립을 요구하는 등 직접적 감독 조치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없습니다.
여기에 SVB 사태로 미국 정부가 보험 한도와 관계없이 예금 전액을 보증키로 한 가운데 우리 금융당국도 예금 전액보호를 포함해 관련 절차를 검토 중입니다. 현재 5000만원인 예금자 보호 한도를 1억원 이상으로 상향하는 법안도 다수 발의돼 있어 실제 한도 상향으로 이어질지 주목됩니다. 우리나라의 예금 보호 한도는 2001년 이후 22년째 5000만원으로 묶여 있습니다.
부동산PF·스타트업 등 한국 자본시장 전반 재점검해야
아울러 한국 자본시장의 뇌관으로 꼽히는 가계부채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 가상화폐 등의 시장에서 선제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잇따릅니다. 116조 원(2022년 3분기 기준)에 이르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1749조 원(2022년 말 기준)의 가계부채 등은 앞서 레고랜드 사태에서도 위기의 진앙이 된 바 있습니다. 이필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는 국내의 부실 PF와 관련한 종합대책을 내놓고 시장 불확실성을 사전에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고 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결국 부동산 가격 안정으로 우리 경제의 뇌관인 가계부채와 부동산 PF를 연착륙해야 한다”며 “이들 대출의 부실화가 또다시 불거져 증권회사들이 흔들릴 경우 레고랜드 사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파국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이번 사태로 스타트업·중소기업 생태계를 재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벤처시장에서는 SVB 폐쇄로 이 은행에 자금이 묶인 국내 기업과 벤처캐피털 등에 대한 대책 등 손에 잡히는 실질적 대응 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입니다. 한 전직 국책연구기관장은 “경기 부진으로 우리의 스타트업 생태계도 위축된 상황”이라며 “이번 사태로 관련 기업이 자금 경색과 도산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장 역시 “부동산 PF 문제뿐만 아니라 한계기업의 상환 부담이 가중되고 있고 차입 비중이 큰 스타트업 문제도 나타날 수 있다”며 “이런 우리 경제의 약점과 강하게 연결된 저축은행·지방은행 등 재무건전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금융기관에서 탈이 날 수 있는 만큼 당국이 철저하게 모니터링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짚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