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4일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에서 통과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법률안 재의요구권)을 행사한 것은 역대 정부의 농정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풀이된다. 과거 정부는 보수·진보 정권을 막론하고 정교한 농업 선진화 정책을 펴기보다는 지역 표심을 사려고 혈세를 쏟는 포퓰리즘에 머물렀다. 그 결과 막대한 돈을 쓰고도 농민은 여전히 가난하고 농촌은 낙후됐다는 오명을 벗지 못했다.
퍼주기식 포퓰리즘 농정이 두드러진 것은 2005년 세계무역기구(WTO) 농업 협상 무렵부터였다. 당시 우리 정부는 해당 협상으로 1948년부터 이어온 추곡수매제를 폐기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정부는 이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으로 ‘쌀소득보전직불제’를 도입해 쌀 가격과 농가 소득을 떠받쳐왔다. 고정 직불금을 통해 1㏊당 일정 금액을 혈세로 지급하고 정부가 정한 목표 가격에 미달하면 변동 직불금을 통해 차액의 85%까지 보전해주는 방식이다. 재배 면적이 클수록 직불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영농의 규모화를 추진해 쌀농사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정부가 수요와 가격을 떠받치는 구조 탓에 쌀 가격의 탄력성을 떨어뜨린다는 심각한 문제를 노출했다. 일단 정부가 쌀 가격을 일정 수준으로 설정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 태생부터 시장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제도였다. 국회예산정책처의 ‘쌀소득보전직불제 성과의 실증 분석’에 따르면 정부의 목표 가격이 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쌀 수급 균형가격보다 높은 수준에서 설정된다. 이에 맞춰 농가는 직불과 변동 직불금을 포함해 쌀 수취 가격도 목표 가격의 99.2%까지 보장받는 형태다. 쌀 농가로서는 가격이 보장되기 때문에 수요가 줄어도 급격하게 쌀 생산을 줄일 유인이 떨어진다.
정치권 역시 선거 때마다 농가 표를 의식해 쌀값을 보전해주겠다는 포퓰리즘적인 공약을 남발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결국 임기 중에 70만 원 수준이던 고정 직불금을 1㏊당 평균 100만 원, 목표 가격은 18만 8000원까지 인상했다. 정부가 혈세로 가격을 떠받치는 탓에 쌀은 남아돌았다. 농촌경제연구원은 2012~2021년 쌀 소비량은 연평균 2% 하락했지만 생산량은 연평균 0.4% 감소했다고 분석했다. 쌀이 남아돌면서 정부가 매년 30만 톤 이상의 쌀을 공공 비축미로 사들이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문재인 정부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공급과잉의 딜레마를 타개해보고자 변동직불금제도를 포기하고 공익직불금제도를 도입했다. 재배 면적이 작은 소농이 직불금을 더 많이 받는 형태로 재배 면적 구조 조정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2019년 박완주 당시 민주당 의원(현 무소속) 주도로 공익형직불제법이 통과됐다. 정부도 ‘쌀 중심의 농정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작물 간의 형평성 제고하겠다’고 홍보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야당이 되자 돌변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 쌀 공급과잉을 지적하며 초과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는 양곡관리법을 국회에서 단독 처리한 것이다. 결국 전임 정권들의 ‘폭탄 돌리기’ 문제를 떠맡게 된 윤 대통령이 “포퓰리즘 법안”이라며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민주당의 폭주에 제동을 건 상황이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는 5년 새 4.3㎏이 줄어든 1인당 연간 쌀 소비량과 인구 감소에 맞춰 줄어들지 않는 쌀 생산, 늘지 않는 농가 소득 문제를 풀어야 한다. 정부는 청년농을 육성하고 스마트팜 등 자동화를 통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농업을 전환하겠다는 입장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농업을 생산성 높은 산업으로 발전시켜서 농가 소득을 향상시키자, 농촌과 농업을 재구조화해서 잘사는 농촌으로 발전시켜나가자는 것이 우리 정부 목표”라고 강조했다.
한편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6일 민당정 협의회를 개최해 관련 대책을 마련한 후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