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값싼 전기료로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상계관세 같은 통상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미국 쪽이 최근 한국전력(015760)에 정보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해 말 제기했던 우려다. 이는 올 들어 미 상무부가 우리의 값싼 전기료를 문제 삼아 현대제철(004020) 후판에 무역 보복 조치인 0.5%의 상계관세를 매기며 현실화됐다. 정부는 그간 공식적으로는 “현재 전기료를 두고 미국 정부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왔지만 이번 예비판정으로 우리나라 전기료가 통상 문제로 비화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현대제철 예비판정에서 미국이 문제 삼은 것은 한국전력이 원가보다 낮은 수준으로 전기를 판매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액화천연가스(LNG) 연료비 급등의 여파로 지난해 한전의 전력 구입 단가는 2020년 대비 90.5% 올랐지만 판매 단가는 9.7% 증가하는 데 그쳤다. 지난해 한전은 전력을 ㎾h당 153.7원에 구매해 120.5원에 판매하면서 33.2원씩 밑졌다. 이렇게 누적된 영업적자는 지난해에만 32조 6034억 원에 달했고 올해도 전기료 조정이 없을 경우 한전의 누적 적자는 50조 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미 상무부는 우리 정부가 압력을 행사해 전기료를 왜곡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미 상무부는 “한국전력 자본의 51% 이상을 소유한 한국 정부는 한전의 업무와 운영에 상당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한전의 운영으로 정부의 정책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며 “한국 정부가 한전의 전기요금 변경 신청을 승인하는 구조로 규제하는 상황에서 한국 내 전기료는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이번 예비판정 결과는 최종판정에서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실제 미 상무부는 2019년 한국산 도금 강판에 반덤핑 판정을 내릴 때도 낮은 전기료를 문제 삼았지만 이후 최종판정에서는 “전기료가 보조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그동안 미 상무부는 우리나라의 전기료가 시장 원리에 부합해 보조금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려왔다”면서 “이번 최종판정에서도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 대응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기료가 지금처럼 원가 이하의 수준을 유지하면 지속적인 통상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 교수는 “우리나라의 전기료가 다른 주요국 대비 싼 것은 사실”이라며 “최근 보조금 문제와 관련해 세계무역기구(WTO)의 분쟁 해결 절차가 사실상 무력화된 상태라 가급적이면 분쟁의 소지를 만들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이미 불거진 문제는 정부의 인플레이션 대응과 경기 침체 문제, 한미 관계 등의 논리로 설득해 피해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로서는 전기료를 올리려니 경기 침체로 신음하는 기업이 고민이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전기료 인상을 더 늦추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게 된다고 경고한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지난해 한전·가스공사의 적자와 미수금에 대해 하루에 지급하는 이자가 매일 50억 원을 넘고 있다”며 “지금이야말로 요금 인상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이라고 강조했다. 조홍종 단국대 교수는 “한전의 채권 발행 규모가 올해만 9조 3500억 원으로 채권시장 자금을 죄다 빨아들여 기업 자금난이 커지고 있다”며 “기존 중소기업 채권 부도와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부실이 겹쳐 증권회사를 중심으로 금융위기가 전이될 수 있다”고 봤다.
결국은 전기료를 현실화해야 에너지 수요 효율화도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산업부에 따르면 한국의 에너지 사용량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대비 1.7배 이상 많다. 반면 에너지원단위(단위 부가가치 생산에 필요한 에너지 투입량)는 OECD 36개국 중 33위로 최하위 수준이다. 에너지 효율 개선도 더딘 상황이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0~2020년 우리나라의 에너지원단위 연평균 개선율은 1.5%에 불과해 미국(2.4%), 일본(2.6%), 독일(4.0%)보다 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