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4거래일 만에 40원 가까이 뛰어오르며 연고점을 경신하는 등 변동성이 극대화되고 있다. 한미 금리 역전 폭이 역대 최대로 벌어진 위태로운 상태에서 대규모 무역수지 적자에 외국인 배당 역송금, 중국 리오프닝 효과 부재로 인한 국내 경기 침체 우려 등 대내외 악재가 겹치며 환율 불안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원·달러 환율이 1430원을 돌파했던 지난해 10월보다 수준 자체는 낮더라도 변동성이 극심해 외환 리스크가 커졌다는 우려가 나온다.
20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2.9원 내린 1322.8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이날 환율은 전일보다 3.89원 오른 1329.5원으로 출발해 장중 최고 1332.3원까지 오르면서 연고점을 돌파했다. 환율이 1330원을 넘어선 것은 지난해 11월 29일(1342.0원) 이후 약 4개월 만에 처음이다. 다만 이날 오후 위안화 반등과 독일 물가 발표 등으로 환율은 하락 반전해 1319.0원까지 급락했다가 소폭 반등한 채로 마감했다.
이날 환율이 장중 급등한 것은 전날 영국의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0.1%로 발표돼 시장의 예상(9.8%)을 넘어선 것에 따른 긴축 우려의 여파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긴축 우려가 재점화되면서 달러화지수(DXY)가 소폭 반등했는데 원·달러 환율은 더욱 크게 반응한 결과다.
영국과 독일 물가에 출렁일 정도로 시장이 극도로 예민한 상태인 만큼 당국의 환율 안정 의지도 통하지 않고 있다. 13일 외환 당국이 국민연금과 외환 스와프를 다시 체결하면서 규모를 350억 달러로 키우겠다고 발표하자 환율은 급락해 14일 장중 최저 1294.7원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약발은 일주일도 가지 못하고 4거래일 만에 1330원 저항선까지 넘어섰다. 시장에서는 외환 스와프가 시의적절한 조치였지만 지속력이 크지 않다는 것만 확인했다는 반응이다.
문제는 원화가 뚜렷한 방향성 없이 맥없이 출렁이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달러화지수와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이 발생하면서 방향성을 상실했다. 19일 기준 달러화지수는 연초 대비 1.5% 하락했다.
그런데 원·달러 환율은 연초 대비 5.2% 상승하면서 주요국 통화 중에서도 가장 큰 폭으로 상승(원화 가치 절하)했다. 통상 달러화 가치가 떨어지면 원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원·달러 환율이 하락하는데 올해 들어 달러와 원화 가치가 함께 절하된 것이다. 특히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가 발생한 3월 초 이후 달러화지수는 2.4%가 떨어졌는데 원·달러 환율은 오히려 소폭 올랐다.
원화 변동성이 커진 것도 특징이다. 종가만 보면 원·달러 환율은 3월 2일 1315.3원에서 이날 1322.8원으로 겨우 7.5원 올랐다. 자칫 환율 변화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원·달러 환율은 3월 내내 하루 10원 이상 급등락을 반복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월 기준 선진국 10개국과 신흥국 23개국 등 33개국과 변동성을 비교했을 때 원화가 가장 심하게 위아래로 출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2011년 유로존 재정 위기, 2014년 미국 통화정책 정상화, 2018년 미중 무역 분쟁 등 주요 이슈 때와는 다른 예외적 현상이다.
이렇듯 원화가 달러화와 탈동조화 움직임을 보이거나 변동성이 커진 것은 대외 요인보다는 대내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가장 큰 원인으로는 무역수지 적자가 꼽힌다. 무역수지는 올해 들어 이달 10일까지 누적 적자가 258억 6100만 달러로 집계됐다. 14개월 연속 무역적자가 이어지면서 경상수지마저 1~2월 두 달 연속 적자가 났다. 한은도 최근 이례적인 환율 변동의 상당 부분이 무역수지 적자 충격의 영향인 것으로 분석했다.
중국 리오프닝 반사이익 없이 국내 경기가 침체 가능성이 커진 것도 원화 약세 요인이다. 지난해 4분기 경제성장률이 -0.4%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 1분기까지 역성장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특히 반도체를 중심으로 대중(對中) 수출이 감소하면서 경기 펀더멘털이 흔들리는 점도 불안 요소다. 단기적으로는 이달 외국인 배당금 역송금 등 수급 문제까지 겹친 상태다.
환율 불안 기저에는 역대 최대인 1.50%포인트까지 벌어진 한미 금리 역전이 자리 잡고 있다. 내외금리차가 환율에 미치는 영향이 줄었다고 해도 역전 폭이 더 확대되거나 장기화하면 불안은 커질 수 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원화 가치 안정을 위해서는 미 연준의 금리 인상 리스크 완화도 필요하지만 대내 리스크 완화도 중요하다”며 “중국 경기 회복세가 약한 가운데 각종 지정학적 리스크가 증폭된다면 원화 가치가 추가 약세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