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일본 증시가 두드러진 상승세를 보여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올해 2만 5834로 출발한 닛케이지수는 지난달 17일 1년 8개월 만에 3만 선을 넘어서며 세계에서 상승률이 가장 높은 지수로 기록됐다. 이후에도 고공 행진을 지속해 이달 들어서는 3만 2000선을 회복하며 거품경제 시기인 1990년 7월 이후 약 33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8일 닛케이지수는 소폭 하락한 채 마감했다.
일본 증시의 호조는 일본 경제가 상대적으로 견실한 성장세를 보이는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수출은 전반적으로 부진하지만 코로나19의 충격 완화와 함께 대면 소비가 활발해지면서 내수가 살아나고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달리 수출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대로 낮다. 대면 서비스 수요 확대가 일본 내수 경기를 뒷받침해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올 1분기 실질 GDP 성장률이 전 분기 대비 2.7%(연율 기준)를 기록했다. 잠재성장률이 0%대로 평가되는 일본 경제로서는 선전했다.
일본에서는 그동안 임금이 정체되면서 소비와 경제성장에 부정적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임금이 뚜렷한 상승세를 보이면서 내수 주도 성장에 대한 기대를 높이고 있다. 물론 지난해 이후 일본도 3% 넘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기록해 실질임금은 2022회계연도(2022년 4월~2023년 3월)에 전년 대비 1.8% 감소했다. 하지만 물가 상승률 둔화와 함께 2023년 후반에는 실질임금이 증가세로 반전될 것으로 기대된다.
올해 춘투(매년 봄에 하는 일본의 임금 인상 투쟁) 때의 가중평균 임금 상승률은 3.67%에 달했다. 민간 조사 기관인 미즈호리서치앤테크놀로지스에 따르면 3%대 후반의 임금 인상률이면 2023년도 개인 소비를 0.6%포인트, GDP는 0.4%포인트 정도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다. 물론 한 번만의 임금 인상으로는 한계가 있으나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새로운 자본주의 정책을 강조하면서 임금 상승을 유도하고 있다. 일본 경제 단체인 게이단렌의 도쿠라 마사카즈 회장도 물가 상승을 뛰어넘는 임금 인상은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이며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기업 입장에서는 임금 인상이 수익을 압박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력 부족으로 도산하는 기업 사례가 늘어나는 상황을 고려하면 생산성과 수익성을 높이는 노력이 중요해지고 있다. 사실 일본 기업은 과거 20년가량의 임금동결 등 장기적인 구조 조정의 효과로 수익성이 개선되고 있어 임금 인상 여력이 있다. 일본 기업의 내부유보(이익잉여금)는 2022년 12월 말 기준 536조 엔에 달했다. 세계경제가 부진한 가운데에서도 일본 기업의 올 3월 결산 결과는 상대적으로 좋았다.
일본 기업은 그동안 확대된 수익과 내부유보를 해외투자와 해외 기업 매수에 활용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앞으로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임금을 인상하는 한편 새로운 이노베이션 시대에 대응하겠다는 자세도 밝히고 있다. 기존의 제조업이 디지털 혁명, 그린 혁명으로 혁신되는 시대에 대응해 일본 기업도 구조 전환에 주력하겠다는 것이다. 일본 기업으로서도 그동안의 방어적 경영에서 벗어나 공격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올 1분기 실질 GDP 성장률에서 설비투자의 성장 기여도가 0.6%포인트에 달할 정도로 일본 경제의 성장을 뒷받침했다.
도요타자동차의 경우 그동안 지체된 전기차(EV) 전략에 박차를 가할 방침임을 밝혔다. 도요타의 2022년 전기차 판매 실적은 2만 4000대에 불과했지만 2026년까지 연간 150만 대, 60배 이상 늘리겠다는 각오를 나타냈다.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불확실성의 고조는 일본 기업에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일본 기업은 이에 대응하면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중국은 기존 산업에서 세계 최대급의 수출 실적을 올리고 있을 뿐 아니라 배터리·태양전지 등 차세대 산업에서도 공급망의 중심적인 지위를 높여가고 있고, 미국은 이런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전략에 힘을 싣고 있다. 일본은 이에 대응하면서 첨단산업 공급망의 중심적인 지위를 회복하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미국도 일본과의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차세대 반도체 분야에서 미일 간의 협력이 강화되고 있다. 미국 IBM은 일본의 국책 반도체 기업으로 도요타자동차·소니·NTT 등 8개사가 출자한 라피더스에 첨단 미세 가공 기술인 2㎚(나노미터·10억분의 1m)의 기초 기술을 이전해 양산을 추진 중이다. 미국 상무부와 일본 경제산업성은 이미 2022년 5월 ‘반도체 협력 기본 원칙’에 합의했으며 양국의 국책 반도체 연구기관 간 협력 체제 구축 및 강화에 나서고 있다.
이와 함께 대만의 TSMC에 이어 미국의 반도체메모리 제조사인 마이크론도 일본 히로시마에 대규모 투자 방침을 밝혔다. 일본에는 세계 유수의 반도체 관련 소재·부품·장비 기업이 밀집해 있어 이들과 긴밀하게 협력해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다.
물론 일본 반도체 산업의 미세 가공 기술은 2세대 이전인 40㎚ 정도 수준에 그치고 있으며 라피더스가 2027년 예정대로 2㎚ 반도체 양산에 성공해도 한국·대만 기업과의 격차를 좁히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미국이 과거와 달리 일본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려는 자세로 변한 데 따른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회복되고 있는 일본 경제에 영향을 줄 주요 변수는 2013년 이후 10년 동안 계속된 대규모 금융 완화정책이다. 일본의 실질임금 회복은 하반기에 소비자물가가 2%대로 떨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최근 엔화가 1달러당 130엔대에서 140엔대로 가치가 다시 떨어져 수입물가의 하락세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일본 경제는 이미 디플레이션을 벗어났다. 2022~2024년 평균으로 소비자물가가 일본은행의 정책 목표인 2%를 초과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단기 정책금리를 마이너스로 하고 10년 만기 장기금리를 0.5%로 억제하기 위해 무조건 본원통화를 대량 방출하는 금융 완화정책은 부작용을 키울 수 있다. 최근 일본 증시뿐 아니라 부동산 가격도 뚜렷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본원통화 대량 방출까지 더해지면 엔화 가치 하락 가능성에 대비한 도피 심리가 작용해 파장이 커질 수 있다.
올 4월 취임한 우에다 가즈오 신임 일본은행 총재는 장기금리까지 중앙은행이 통제하는 데 대해 부정적인 발언도 하는 등 상식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따라서 그동안의 금융 완화정책에 대한 점검 후에 모종의 정책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 경제는 글로벌 경제 불안 속에서도 선방하는 등 과거 장기 불황기와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보다 강력한 성장을 위해서는 저출생과 인구 고령화 등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일본 기업이 그동안 축적했던 현금성 자산도 활용하면서 이노베이션 투자를 확대하고 지속적인 임금 상승 속에서 물가와 엔화를 안정시키고 앞으로 구조 혁신 과제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낼지 주목된다.
이지평 특임교수는…일본 도쿄 출신인 한국 국적의 일본 경제 전문가다. 일본 호세이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경제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98년 LG경제연구원에 입사한 뒤 33년 동안 근무하면서 경제연구 부문 수석연구위원, 미래연구팀장, 산업연구 부문 에너지그룹장 등을 거쳤다. 현재 한국외국어대 융합일본지역학부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