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입자다. 지난해 말 집주인에게 재계약 의사를 밝혔더니 전세보증금을 7200만 원 올리겠다고 했다. 근처에 이른바 ‘특올수리’한 집의 시세보다 5000만 원 더 비쌌다. 살던 집은 15년간 수리하지 않아 낡고 더러웠다. 당시 전셋값은 계속 내려가고 있었고 전셋집을 보러 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나는 집주인이 차가운 현실을 깨닫기를 바라며 그에게 이사를 통고했다. 정작 차가운 현실을 깨달은 사람은 나였다. 집주인은 전세보증금을 돌려달라는 요구에 “전세가 나가지 않으니 달리 방법이 없네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이미 인근의 다른 집과 전세 계약을 맺었다. 기존 집주인에게서 보증금을 돌려받지 않으면 신규 전세 계약의 계약금을 떼일 수도 있는 상황이 됐다. 이사를 하기 며칠 전 기존 집주인으로부터 대출을 받았다며 보증금을 돌려주겠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요즘 역전세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지난 겨울 남들보다 앞서 겪은 나의 역전세난이 떠올랐다. 전세사기를 당해 보증금을 날린 경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당시 받은 스트레스는 컸다. 그때의 경험으로 볼 때 지금 정부가 준비하는 역전세난 대책은 문제가 있다.
정부가 다음 달 발표하는 역전세난 대책의 핵심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완화다. 전셋값이 내려가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면 세입자가 힘들어진다. 세입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집주인이 대출받도록 해준다는 것이 정부 대책이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사안의 폭발력을 경계해서인지 “전세금 반환 목적에 한해, 일시적으로 DSR 완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DSR 규제 완화가 자칫 부동산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줘 집값이 다시 들썩이게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DSR 완화 혜택을 받는 집주인이) 다음 세입자에게 보증을 모두 들어줘야 한다”는 조건까지 내걸었다. 집주인이 대출받아 기존 세입자의 보증금을 돌려주면 신규 세입자는 확정일자 도장을 받아봤자 대출해준 금융사보다 후순위가 된다. 따라서 신규 세입자가 안심할 수 있게 집주인이 신규 세입자의 보증금 반환을 약속하는 보증보험을 들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정부 대책의 가장 큰 문제는 정부가 나서지 말아야 할 때 나선다는 점이다. 집주인 입장에서 보면 보증금은 2년 기한으로 꾼 돈이다. 당연히 2년 뒤 갚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돈이 부족하면 다른 데서 빌려서 해결하면 된다. 정 안 되면 집을 팔면 된다. 지난 겨울 집주인이 “사채 빚을 낼 수는 없잖아요”라고 한 말이 기억난다. 나는 그에게 “집을 팔아서라도 남의 돈을 돌려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소리쳤다. 자기 집 귀한 줄은 알고 남의 돈은 돌려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믿고 사는 신용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 정부는 집주인이 집을 팔면 큰일이라도 벌어질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걱정 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집주인이 집을 팔면 반대로 시장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 집주인이 집을 팔면 집값이 내려간다. 집값이 내려가면 실수요자가 꿈에 그리던 집 장만에 나설 것이다. 집주인은 꾼 돈을 갚아서 좋고, 세입자는 자기 돈을 받아서 좋고, 실수요자는 내 집이 생겨서 좋다. 정부가 그토록 원하는 부동산 시장의 하향 안정화가 가능해진다.
DSR 규제가 완화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집주인은 DSR을 한도까지 채운 사람이다. 이들은 추가로 대출받는 순간 자신의 소득 수준으로는 갚기 힘든 단계로 넘어가고 이들 중 일부는 채무 불이행자가 될 것이다. 금융사의 부실 채권이 늘어 건전성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정부가 국민 혈세를 투입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집주인 가운데 일부는 집값이 오르던 시절 돈을 벌기 위해 갭 투자에 나선 사람이다. 투자는 자기 책임으로 한다. 지금 그런 집주인에게 필요한 것은 역전세난 대책이 아니다. 손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