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004170)의 옛 제일은행 본점 리모델링은 문화재와 상업 시설의 조화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일본인 건축가 히라바야시 긴고가 설계해 1935년 준공된 옛 제일은행 본점은 지하 1층~지상 5층 규모로 연면적은 2520평(8333㎡)이다. 네오바로크 양식 건물로 국내 건물 중 최초로 국제 현상설계를 거쳤으며 철골·철근 구조를 사용한 첫 은행 건물이라는 점에서 건축사적 의미가 크다. 또 이 일대가 조선은행 본점(현 한국은행 본관)과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등이 자리해 100년 전 근대 상업의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지리적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평가다.
이 때문에 신세계는 애초 경기 용인시에 있는 ‘신세계 상업사박물관’만 이전하기로 했으나 건축과 지리적 가치 등을 고려해 상업·근대·건축사를 아우르는 종합 전시관 조성을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세계 상업사박물관은 동전부터 상인들의 장부, 일제강점기 백화점의 카탈로그 및 판매 상품 등 5000여 점의 유물을 갖추고 있다. 특히 주변에 위치한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등과 ‘박물관 벨트’를 형성해 외국 관광객 유치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신세계는 파리 오르세박물관과 빈 미술사박물관 사례에 착안해 옛 제일은행 본점 리모델링을 구상했다. 파리 오르세박물관 역시 실제 열차역을 리모델링해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고 다양한 식음 시설을 갖췄다는 점에서 지향점이 같다. 지상 1~3층 판매 시설에는 글로벌 명품을 비롯한 다양한 브랜드가 입점할 것으로 보인다. 쇼핑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고급 레스토랑도 들어선다. 신세계 측은 “하중 문제를 고려해 주방 시설이 많이 필요한 한식보다 이탤리언 레스토랑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4층 상업·근대·건축사 박물관은 공사 과정에서 해체된 천장 문양 등 부재와 남대문 일대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 자료, 옛 제일은행 금고 등을 전시할 계획이다. 5층에는 외국 관광객을 위해 한식 디저트 카페와 옥상 정원 등이 조성된다.
다만 상업 시설이 지나치게 부각될 경우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예를 들어 문화재 건물 외벽에 프랑스 명품 브랜드 샤넬의 쇼윈도가 있는 셈이다. 신세계는 현재 글로벌 명품 브랜드를 옛 제일은행 본점 공간에 유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 때문에 서울시 문화재위원들도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옛 제일은행 본점이 자칫 명품 브랜드 건물로 오인될 수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세계의 복합문화공간이 완성되면 롯데와 ‘유통 1번지’ 타이틀을 둘러싼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인근 소공동에는 롯데백화점이 본점과 명품관 에비뉴엘, 영플라자, 롯데호텔, 면세점 등을 연계해 ‘롯데 타운’을 완성했다. 옛 제일은행 본점 공사가 완료되면 신세계백화점 본점과 면세점, 레스케이프호텔 등과 더불어 ‘신세계 타운’이 완성된다. 이는 30년이 넘는 기간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 꿈꿨던 숙원 사업이다.
올 1분기 신세계백화점 매출은 6209억 원, 영업이익은 1103억 원으로 롯데백화점(매출 7960억 원·영업이익 1301억 원)의 뒤를 바짝 쫓고 있다. 관련 업계는 옛 제일은행 본점이 리모델링해 문을 열면 신세계백화점의 오프라인 경쟁력 강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신세계는 지난해 국내 백화점 가운데 매출 1조 원 이상을 기록한 점포가 총 4곳(강남점·센텀시티점·대구점·본점)으로 가장 많았다. 40여 년간 국내 백화점 매출 1위를 기록했던 롯데 본점은 2017년부터 신세계 강남점에 자리를 내준 상황이다. 이에 롯데 본점이 절치부심해 대대적인 리뉴얼에 돌입하자 신세계백화점은 올해 약 6000억 원을 투자해 신규 점포를 내고 기존 점포 리뉴얼을 하겠다며 맞불을 놓고 있다. 신세계 본점 에르메스 매장을 복층 형태로 재단장하고 강남점의 남성 패션관을 재정비한 게 대표적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백화점은 판매 상품 특성상 복합쇼핑몰과 달리 브랜드 헤리티지(역사)가 소비 심리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며 “단순 매출이 아닌 국내 대표 백화점이라는 타이틀을 둘러싼 신세계와 롯데의 자존심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