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가상자산거래소의 시세조종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으며 업계는 기관투자가의 가상자산 시장 진출이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기관이 대규모 자금을 공급하면 시장의 유동성이 커져 시세조종에 취약한 국내 가상자산 시장의 병폐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업계는 기관이 가상자산 시장에 진입해 신사업을 확대하고 포트폴리오를 늘려 수익원을 다각화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가상자산 시장은 올해 초부터 시세조종 논란에 휩싸였다. 주로 국내 거래소에서만 거래가 이뤄지는 김치코인인 ‘퓨리에버(PURE) 코인'은 지난해부터 시세조종 의혹에 휘말리며 강남역 납치·살해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논란이 확산되자 검찰은 지난 4월 “김치코인은 유동성 부족과 시세조종에 극히 취약하다”며 국내 시장의 구조정 병폐를 지적했다. 지난 3월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지난해 하반기 가상자산사업자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거래소에 단독으로 상장된 가상자산의 절반 이상(57%)은 김치코인으로 나타났다.
업계 관계자들은 가상자산의 논란이 계속되는 원인으로 국내 가상자산 시장의 유동성이 부족한 점을 꼽았다. 유통시장은 투자자를 유입하고 유동성을 확보할수록 안정성이 담보되는데 국내 금융당국의 그림자 규제로 거대 자본을 가진 기관의 시장 진출이 막혀 시세조종에 취약한 구조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레온 풍(Leon Foong) 바이낸스 아태지역 대표는 지난 4월 바이낸스와 블록체인법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디지털 혁신 학술 포럼’에서 “시세조종을 줄이기 위해 글로벌 유동성을 공급하는 게 중요하다”며 “한국은 (가상자산 시장에 대한) 기관의 참여가 제한돼 작은 규모의 업체가 시세조종을 주도하는 상황이 많다”고 설명했다. 임종인 고려대학교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도 “가상자산은 가격 변동성이 커 안정성에 대한 우려로 기관 투자가 제한됐다”며 “가상자산 시장이 개인투자자의 투전판으로 몰락한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초국경적인 가상자산의 특성상 특정 지역의 규제가 글로벌 수준에 비해 지나치게 과하면 글로벌 사업자가 그 지역에서 사업할 이유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며 “한국은 규제에 의한 갈라파고스화를 겪는다”고 전했다. 갈라파고스화 현상은 자신들만의 표준만 고집해 세계시장에서 고립되는 현상을 뜻한다.
업계는 가상자산 시장의 건전화를 위해 기관투자가의 시장 진입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가상자산 업권법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기관에 실명계좌를 발급하는 내용을 논의해 유동성을 공급하고 건전화를 꾀해야 한다는 전략이다. 풍 대표는 “국내 가상자산 시장의 유동성을 늘리기 위해 해외 기관이 계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며 “그림자 규제로 막힌 가상자산 거래용 법인계좌 개설 조항을 법률로 명확히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임 교수는 “가상자산 시장을 제약하지만 말고 건전한 육성책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며 “기관투자가는 소문이 아닌 전문 지식을 기반으로 가상자산의 상품성과 프로젝트의 성장 가능성을 분석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금융사가 주식과 선물 리서치를 발간하듯이 가상자산 평가 보고서를 통해 일반인들도 기관의 동향을 참고할 수 있다”며 “기관의 매매 내역이 공유되고 기관을 통해 간접 투자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시장도 안정을 찾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채상미 이화여자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기관은 고객의 자산을 운용하는 만큼 투자 대상을 면밀히 분석한다"며 “개인투자자가 제한된 정보로 투자하는 것에 비해 보다 정교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전했다.
기관의 가상자산 투자가 허용되면 전통 금융사에도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가상자산을 펀드나 선물 투자에 활용해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자산운용이 지난 1월 홍콩 주식시장에 상장한 비트코인(BTC) 선물 상장지수펀드(ETF)는 3개월 만에 55.8%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박성진 삼성자산운용 홍콩법인장은 “비트코인 ETF의 가격과 거래량이 상승한 건 비트코인이 달러의 대체자산으로 시장에서 인정받았기 때문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골드만삭스가 올 1월 발표한 자산 수익률에 따르면 비트코인의 연초 누계 수익률은 27%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와 금·부동산을 넘어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채 교수는 “기관 입장에서는 수익 구조를 늘리고 다양한 상품을 갖추는 게 매우 중요하다”며 “신사업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도 큰 기회"라고 덧붙였다.
다만 기관의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서는 업권법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마저도 투자자 보호에 치중돼 가상자산의 공시·발행 등 시장을 규율하는 조항은 제외됐다. 국회는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을 우선적으로 통과시킨 뒤 2단계 입법에서 이를 논의할 예정이다. 황현철 홍익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법적 규제로 시장의 투명성과 안전성을 우선적으로 확보하지 않으면 기관투자가도 선뜻 가상자산에 투자하기를 꺼릴 수 있다”며 “기존의 상법이나 공정거래법 등의 체계로 시장을 규율하기도 어렵고 관련 법도 없어 시장이 방치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채 교수는 “투명한 발행과 공시 등 제도적 규율이 마련되지 않으면 기관 입장에서 진입하기 힘들 수도 있다”며 “가장 시급한 건 업권법 제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