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의자왕 즉위 2년째인 642년 신라를 침공해 대야성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40여 개의 성을 함락했다. 하지만 18년 후인 660년 신라의 침공을 받고 황산벌 전투에서 져 멸망했다. 18년 만에 전세가 역전된 이유가 뭘까.
영화 ‘황산벌’을 보면 신라의 침략에 맞설 대책을 논의하는 회의 장면이 나온다. 의자왕이 신하들에게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설 것을 요청한다. 신하들은 거절하며 3년 전 의자왕이 자식들을 모두 좌평에 임명하면서 왕권을 강화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한다. 의자왕이 “나라가 망하게 됐다”고 하소연하지만 신하들은 “그 나라가 너희들 부여씨의 나라지 우리 나라는 아니다”라고 한다. 결국 신하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의자왕은 계백 장군을 따로 불러 전쟁 참여를 지시했고 계백 장군은 5000명의 결사대만으로 전투에 나섰다. 백제는 더 많은 군인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론이 분열되면서 멸망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우리나라는 경쟁국에 비해 군인, 즉 엔지니어 숫자가 매우 부족하며 앞으로 차이는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은 실리콘밸리에서 전 세계의 우수 인력을 받아들이고 있다. 또 미국 대학은 학과별로 정원이 고정돼 있지 않아 특정 분야의 인력이 필요하면 해당 학과의 정원을 늘려 인력을 충분히 양성할 수 있다. 중국은 인구 대국이어서 1년에 1000만 명 이상의 대학생이 졸업하며 그 중 최상위 학생들이 반도체 분야를 전공한다. 대만은 우리보다 인구는 적지만 반도체 산업에 집중적으로 인력이 투입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반도체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인재도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반도체 인력 양성에 집중하지 못하고 분산된다. 최근 서울대에 첨단융합학부가 신설되고 218명이 증원됐지만 반도체 외에 혁신신약·헬스케어·데이터과학·지속가능기술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많다.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 장군의 결사대가 아무리 용맹하더라도 5000명의 군사가 5만 명을 상대한다면 결과는 분명하다. 반도체 전쟁에서도 군인 수가 적다면 결국 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결과가 명백하게 예상되는데도 마땅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고 있다. 교육부는 반도체 인력 양성을 위한 정책을 많이 시도하지만 우리나라 대학 전체의 균형 발전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사용 가능한 정책 수단이 제한적이다. 현장 교육을 담당하는 대학 당국도 반도체 인력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또 다른 중요한 어젠다도 많이 있다. 서울대만 하더라도 반도체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학과 신설이 수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마치 반도체 분야 사람들이 치르는 전쟁이니 다른 분야에서 군사를 내줄 수는 없으므로 반도체 분야 사람들이 결사대를 이끌고 전쟁에서 승리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러는 사이 반도체 전쟁에서의 황산벌 전투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