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패권 전쟁이 국가 대항전처럼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미국·중국·한국·대만·일본 외에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도 가세해 다자 대결 양상으로 번져가고 있다. 주요국 정부들은 막대한 보조금 지급 등 동원 가능한 전방위 지원책을 쏟아내며 반도체 산업 주도권 잡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대한전자공학회장인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3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반도체 대전(Chip War)’에서 한국이 승리하려면 인재 확보가 필수적인데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라며 대학 전공 벽 허물기, 외국의 반도체 우수 인재 유치, 경력 단절 반도체 인력의 재교육 활성화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조만간 인공지능(AI)을 위한 전문 반도체 시장이 열린다면서 “이 분야는 아직 승자가 없는 만큼 혁신적인 AI 반도체 설계 전문 인력을 키우기 위한 투자와 지원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문했다.
-프랑스·독일·영국 등 유럽 국가들까지 참전하는 등 글로벌 반도체 전쟁이 격화하고 있다.
△스위스·이탈리아 합작 기업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가 미국 반도체 회사 글로벌파운드리스와 손잡고 75억 유로를 들여 프랑스에 공장을 설립하기로 했다. 여기에 투입되는 자금의 40%인 29억 유로(약 4조 원)를 프랑스 정부가 보조금으로 주기로 했다. 이는 프랑스 정부가 개별 기업에 지급하는 보조금으로는 2017년 이후 최대 규모이다. 영국도 반도체 산업 지원 정책을 발표하고 인재 양성 등에 최대 10억 파운드(약 1조 6100억 원)를 투입하기로 했다. 독일 정부도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업체인 대만 TSMC의 첫 유럽 공장 유치를 위해 보조금 지급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반도체 대전에 뛰어드는 것은 경제 안보 측면에서 ‘반도체 생산 거점’을 자국에 확보해야 한다는 인식이 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 반도체 기술 수준이 아직 한국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 업체들을 따라잡으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더라도 유럽연합(EU) 차원에서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 확보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으므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반도체 부흥론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11월 도요타·소니·NTT 등 일본의 8개 대표 기업이 뭉쳐서 ‘라피더스’라는 반도체 기업을 만들고 ‘반도체 부흥’을 꿈꾸고 있다. 라피더스는 2025년 2나노 반도체 시제품을 제작한 뒤 2027년에는 대량 생산에 나선다는 목표를 세웠다. 특히 미중 갈등 국면에서 일본의 지정학적 강점이 부각되면서 TSMC·인텔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잇따라 ‘일본행(行)’을 추진하고 있다. 이들 기업이 일본에 대규모 생산 거점을 늘리면 반도체 생태계 중심이 일본으로 쏠릴 수 있다. 무엇보다 일본에는 글로벌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기업이 즐비해 반도체 생산의 재료 수급은 물론이고 연구개발 협력에서도 강점이 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부활 가능성은.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은 TSMC, 삼성전자에 인텔이 도전장을 내미는 3강 구도다. 이 업체들이 10나노 이하의 미세 공정이 가능한 반도체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반도체 업체의 기술 수준이 삼성전자 등에 많이 뒤처져 있기 때문에 일본이 반도체 대국의 위상을 되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단하기보다는 일본 반도체 산업의 추이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강점인 반도체 ‘소부장’ 분야에서 돌파구를 마련한다면 경쟁력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우리와의 기술 격차가 있지만 추격 당할 수 있는 만큼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미국의 대(對)중국 반도체 제재 강화로 우리 반도체 산업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많은데.
△반도체 설계·노광장비(EUV) 시장을 미국이 장악하고 있어서 우리나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다. 미국과의 협력이 중요하다. 중국은 한국의 반도체 산업 의존도가 높다. 한국 기업들이 반도체를 공급하지 않으면 중국도 답답한 상황이 되기 때문에 중국의 눈치를 과도하게 볼 필요는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새로운 장비 반입 금지 조치가 현실화하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중국 현지 공장에서 첨단 제품 생산이 차질을 빚을 경우 우리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공장을 짓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려면 용수·전력 문제 등 걸림돌이 많다. 정부가 이런 문제를 푸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 최근 정부가 경기도 용인에 들어설 반도체 국가산업단지 건립에 필수적인 전기·용수·도로 등 핵심 인프라 확보를 위해 조속한 인허가 지원을 하기로 한 것은 고무적이다.
-AI 반도체가 새로운 전장(戰場)으로 떠오르고 있다.
△AI와 반도체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 기술이다. 이러한 두 핵심 기술을 연결해주는 제품이 AI 반도체다. AI 시장이 커질수록 고성능 반도체 수요가 크게 늘어난다. 최근 미국 그래픽처리장치(GPU)의 강자인 엔비디아가 주목받고 있는 것은 AI 반도체 수요 증가에 대한 시장의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AI 반도체는 시작에 불과하다. 조만간 AI를 위한 전문 반도체 시장이 열릴 것이다. 아직 이 분야에서 절대 강자가 없는 만큼 우리도 혁신적인 AI 반도체 설계 전문 인력을 키워야 한다. 현재 국내 반도체 스타트업 가운데 엔비디아와 비슷한 성능의 AI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곳이 꽤 있다. 하지만 대부분 업체들이 자금 부족으로 소프트웨어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정부가 나서서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시스템반도체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반도체 경쟁력을 높이려면 무엇보다 인재가 중요하다. 하지만 국내 반도체 인력 부족이 심각하다. 반도체 관련 학부인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만 하더라도 대학원 정원의 80% 밖에 채우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수도권 대학의 첨단 분야 학부생 정원을 증원했는데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서울대의 경우 첨단 분야 학부 정원을 218명 늘렸지만 여기에는 반도체뿐 아니라 신약 등 5개 분야가 포함됐다. 실제 반도체 부문 정원 확대는 몇 십 명에 그치는 셈이다. 반도체 패권 다툼은 결국 인력 싸움이다. 승리하려면 인재 확보가 필수적인데 지금 우리는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래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반도체 인재 양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국가 차원의 다양한 지원 정책이 절실하다.
-반도체 인력을 확충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새로운 교육 과정을 만들고 인력을 양성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미국과 대만은 외국 반도체 인력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입법과 정책을 추진 중이다. 우리도 외국에서 반도체를 전공한 학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베트남 등 동남아 지역 대학에서 반도체를 배운 똑똑한 학생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한국 대학에 많이 지원할 수 있도록 장학금 지급 등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대학 졸업 후 한국에 남아 정착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외국 학생들이 기술만 익힌 뒤 자기 나라로 귀국해버리는 상황도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하기에는 우리 반도체 산업의 인력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 해외 인재 유치 못지 않게 국내 인력의 국외 유출 방지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할 때까지는 지원 프로그램이 꽤 많이 있다. 그런데 박사 학위를 딴 뒤가 문제다. 마땅한 지원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다. 이로 인해 많은 국내 인재들이 고(高)연봉 등을 제시하는 미국 반도체 기업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이들 고급 인력이 박사 후 연구원 등의 신분으로 국내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최근 정부가 대학 학과·학부제 규정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아주 잘한 일이다. 반도체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대학 전공 간의 벽을 허무는 작업에 속도를 내야 한다. 현재도 일부 대학에서 여러 전공 과목을 배우는 융합교육 과정을 운영하고 있지만 활성화돼 있지 않다. 서울대에서도 반도체연합 전공이 있는데 경쟁률이 3 대 1을 웃돈다. 80명 모집에 300명 가까이 몰린다. 학교 입장에서는 지원자 모두를 수용하고 싶지만 교원을 확보하지 못하고 실습 공간과 장비 등이 부족해 80명으로 제한하고 있는 형편이다. 정부가 교원 및 실습 장비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 전공을 이수했지만 경력이 단절된 인력을 재교육하는 것도 효율적인 인력 확보 방법이 될 수 있다. 미국의 정보기술(IT) 분야 빅테크 회사들은 인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리턴십(returnship)’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리턴십이란 리턴(return)과 인턴십(internship)의 합성어다. 기존에 직장을 다니다가 경력이 단절된 인력을 대상으로 인턴과 같은 업무를 통해 뒤처졌던 지식이나 기술을 훈련시켜 직장 복귀를 돕는 것이다. 우리 정부도 이런 시스템을 만드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He is…
1965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 달성고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퍼듀대에서 전기컴퓨터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루이지애나대 조교수, 반도체 회사 인텔의 선임 엔지니어를 거쳐 2001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시스템반도체 PD, 국가 미래성장동력 지능형반도체 추진단장 등을 역임했다. 올해 1월부터 대한전자공학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