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초유의 반도체 한파 속에서도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1위 업체인 TSMC가 가격 인상을 단행했다. 고수익인 5㎚(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의 첨단 반도체 고객사가 늘어나고 이에 대응하는 기술에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TSMC를 바짝 뒤쫓는 삼성전자는 라이벌 회사에 비해 낮은 가격으로 승부수를 띄웠으나 기술이나 생산능력 측면에서 아직은 격차가 있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24일 TSMC에 따르면 올 2분기 회사의 웨이퍼 개당 판매 가격(12인치 환산 기준)은 5377달러(약 690만 원)였다. 지난해 같은 기간 평균 가격(4780달러)보다 12.48%나 오른 금액이다. 직전 분기 대비로는 3.7% 올랐다.
통상 반도체 업체들은 비수기로 접어들면 웨이퍼 가격을 내린다. 고객사 한 곳이라도 더 끌어들여 매출을 올리려는 전략 때문이다. TSMC도 비수기를 피해가지 못했다. 올 2분기 매출은 156억 80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3.7% 곤두박질쳤다.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60%의 점유율을 차지한 TSMC지만 최근 반도체 시장에 불어닥친 수요 둔화 현상을 피하지 못했던 탓이다. TSMC가 가격을 인상한 것을 상당히 이례적인 현상으로 보는 이유다.
TSMC가 불황에도 가격을 인상한 것은 인공지능(AI)의 요소가 가장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보기술(IT) 시장에서 챗GPT 등으로 ‘생성형 AI’ 붐이 일면서 고급 반도체 수요가 늘어났다. TSMC의 매출 구조를 보면 AI 반도체 등 고급 칩 생산에 활용되는 7㎚·5㎚ 공정 매출이 전체의 53%를 차지하고 있다. 양산을 시작한 TSMC의 첨단 3㎚ 공정은 웨이퍼 한 장당 2만 달러(약 2565만 원)를 지불해야 하는데, 높은 비용에도 AI 시장 선점을 노리는 엔비디아·AMD 등 세계 최대 칩 설계 회사가 이 회사의 공정을 활용하기 위해 줄을 섰다. 공급자 우위의 구조이다 보니 가격을 올린 것이다. 매출 하락에도 TSMC의 2분기 영업이익률은 42%에 달한다.
한편 시장 2위인 삼성 파운드리는 TSMC 대비 저가 정책으로 고객사 모시기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TSMC의 공정 완성도나 노하우, 패키징 기술 등을 따라잡으려면 시간과 노하우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TSMC가 웨이퍼 가격을 올리고 있지만 기술·생산능력 면에서 운영이 워낙 뛰어나다”며 “세계 최대 칩 설계 회사들이 비싼 돈을 들여서라도 파트너십을 맺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