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점은 중요하지 않다. 과감하고 끈기 있는 도전이 승패를 가른다. 반도체 성공 DNA를 바이오 신화로 이어가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올 5월 방미 중 삼성바이오로직스 북미 법인 임직원들에게 남긴 당부다. 바이오를 제2반도체로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임직원들을 독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은 2010년 바이오·제약을 미래 신수종 사업으로 선정하고 의약품 위탁 생산 업체인 삼성바이오로직스(2011년), 바이오시밀러 개발 업체인 삼성바이오에피스(2012년)를 설립했다.
진입장벽이 높은 바이오 산업에서 삼성은 신속한 의사 결정과 과감한 투자로 글로벌 초격차를 위한 행보를 이어갔다. 삼성답게 준비된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해 4월 삼성바이오에피스를 100% 자회사로 편입했다. 글로벌 1위의 압도적인 생산 능력과 속도, 장기간 쌓은 품질의 신뢰는 초대형 수주 성과로 나타났다. 올해 상반기 누적 수주는 17억 9800억 달러(약 2조 3387억 원)로 이미 지난해 전체 수주를 넘어 연간 최대 규모를 경신했다. 삼성바이오에피스 역시 바이오시밀러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글로벌 매출 1위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휴미라’의 바이오시밀러는 이달 초 미국 시장에 출시됐다.
삼성은 반도체 시장에서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해 세계 1위의 성공 신화를 만들었다. 바이오도 반도체의 길을 갈 수 있을까. 아직 삼성의 바이오 신화는 완성되지 않았다. 반도체 성공 DNA를 이어갈 바이오 신화는 결국 신약 개발로 완성될 것이다. 현재까지 빛나는 성과를 내고는 있지만 의약품 위탁 생산과 바이오시밀러 개발만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삼성이 개발 중인 신약은 삼성바이오에피스가 2017년 시작한 급성 췌장염 파이프라인 1개뿐이다. 현재 임상 1상 완료 상태로 개발이 완료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신약 개발이 그렇듯 성공 여부도 장담할 수 없다. 삼성이 신약 개발에 속도를 내려면 글로벌 빅파마들처럼 바이오텍에서 신약 개발 기술을 이전받거나 인수합병(M&A)하는 방식이 가장 빠르다는 얘기가 나온다.
신약 개발은 멀고도 험난한 길이다. 최소 10년이 넘는 임상 기간과 조 단위의 막대한 규모의 연구개발(R&D) 비용,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예측 불가한 상황 등 난제가 넘친다. 국내 제약 업계는 그동안 신약 개발을 위한 숱한 도전에 나섰지만 ‘36호’ 신약을 개발하는 데 그치고 있다. 아직 조 단위의 매출을 올리는 블록버스터 신약도 없다. 글로벌 빅파마들과 견주기에는 모든 면에서 격차가 크다.
한국에서 언제쯤 블록버스터 신약을 볼 수 있을까. 정부는 2030년까지 블록버스터 신약 3개를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내놓았다. 하지만 블록버스터 신약은 정부의 구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미래를 내다보는 오너의 통찰력과 결단, 그리고 연구진의 끈기 있는 도전이 결합될 때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과물이다. 이 회장의 표현처럼 과감하고 끈기 있는 도전이 승패를 가른다. 비단 삼성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바이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신약 개발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과 도전의 연속”이라고 밝혔다.
정부도 바이오헬스5개년계획 등을 통해 세제 지원과 컨트롤타워 구축 등 다양한 지원책으로 뒷받침할 계획이다. 제약·바이오 업계는 신약 개발에 마중물이 될 보다 파격적인 지원책이 마련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블록버스터 신약이 나올 때가 됐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그리고 오너의 결단과 뚝심이 블록버스터 신약 개발을 앞당길 수 있다. 이 회장이 결단해야 할 시간도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