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기업 이사진 선임 등 자산운용사의 의결권 규모와 행사 내용을 한데 모으는 작업에 착수했다. 운용사들이 포스코(POSCO)·KT·KT&G 등 소유분산기업의 주주총회 거수기 역할에서 벗어나는지 여부를 들여다보기 위한 기초 작업이다.
금융감독원은 2일 한국거래소·금융투자협회와 함께 운용사의 의결권 행사 공시 서식을 표준화하고 공시 정보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거래소와 금투협으로 이원화된 현 공시 관리 체계를 거래소로 일원화하기 위해서다.
금감원은 우선 운용사의 의결권 행사 이력 등을 쉽게 참고할 수 있게 체계를 고치기로 했다. 구체적으로는 기업 임원 후보자의 적정성을 판단할 때 과거 선임 여부, 찬반 사유에 대한 정보를 더 뚜렷하게 드러나게 할 예정이다. 또 기업가치에 큰 영향을 미친 안건에 대해 운용사가 적절하게 찬반 의사를 표시했는지도 투자자들이 쉽게 참고할 수 있게 한다. 금감원은 이와 관련해 금융투자업 규정 시행세칙 등 공시 서식을 개정하고 이를 내년 초 정기 주주총회부터 적용할 방침이다.
지금까지는 거래소와 금투협 간 공시 대상·범위·기간 등이 달라 당국이 의결권 행사 지분 규모와 내역을 제대로 통계화한 적이 없다. 금투협은 의결권 행사 내역을 운용사가 제출한 펀드별 영업 보고서를 통해 매 분기 공시하고 거래소는 상장 주식을 대상으로 매년 1회 공표한다. 두 기관의 체계 모두 사실상 서류만 제출받는 구조여서 운용사들의 의결권 상세 내역을 일목요연하게 분류할 수 없었다. 의안 유형 구분이나 주식 수 기재 기준도 명확하지 않아 운용사끼리 비교할 수 없고 각각의 의결권 행사 목적을 검색하기도 힘들다. 금감원 관계자는 “운용사의 책임 운용을 유도하고 주주가치를 제고해 투자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선순환 체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금융 당국이 운용사 의결권 행사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기로 한 것은 소유분산기업 경영진 선임 문제에 운용사가 더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특히 이복현 금감원장이 2월 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CEO)들을 불러모아 “소유분산기업의 부적절한 이사진 선임에 대해 의결권을 적극 행사해달라”고 주문하면서 관련 작업이 급물살을 탔다.
소유분산기업은 지분이 잘게 분산돼 뚜렷한 주인이 없는 기업을 뜻한다. 이 원장은 당시 ‘정부의 인사 개입과 연관된 요구가 아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정부가 특정의 누군가를 시킬 의도로 지배구조 사안을 얘기한 바 없다”고 반박했다. 금감원은 이 원장의 발언 직후인 4월 자본시장연구원, 운용사 7곳과 함께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 개정 실무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켰고 이번 공시 관리 체계 개선 작업은 TF의 첫 결과물이다.
금감원은 앞으로 TF를 통해 운용사 의결권 가이드라인 개정 등 후속 조치 마련에도 속도를 낼 계획이다. 운용사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은 운용사의 의결권 행사가 주주 권익 보호, 기업가치 제고에 부합하도록 하는 의사 결정 원칙과 구체적인 판단 기준을 담고 있다. 가이드라인은 2008년 금투협 모범 규준으로 처음 제정돼 2016년 한 차례 개정을 거쳤다. 금감원은 현 가이드라인이 운용사가 실제 의결권 행사를 위해 참고하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보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의결권 가이드라인 개정 등 기타 제도 개선안은 TF가 충분한 논의를 거쳐 최종안을 확정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