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단독]도면 100번 수정 땐 요청서도 100건…"새 공장 짓지 말란 소리"

거미줄처럼 얽힌 틈새 규제…제조업 혁신 가로막아

형식 얽매인 기술자료 규제, 가전사 공정 혁신 지연

고압가스·소방시설 규정 반도체 라인 전환의 장벽

52년째 그린벨트 규제, 기아 전기차 투자 유인 저해

도심 속 101년 된 BMW 뮌헨공장 유연한 라인 전환

官 순환보직, 소극적 행정이 거미줄 규제 더욱 부채질

기아 광명 오토랜드 공장 전경. 옛 소하리 공장인 이곳은 1970년에 자동차 공장으로 허가받아 착공됐지만 이듬해 행정 착오로 공장 주변 일대가 그린벨트로 지정됐다. 기아는 자체 공장 부지임에도 이곳에 전기차 라인 등을 증개축하려면 수백억 원의 그린벨트 부담금을 물어야 한다. 연합뉴스기아 광명 오토랜드 공장 전경. 옛 소하리 공장인 이곳은 1970년에 자동차 공장으로 허가받아 착공됐지만 이듬해 행정 착오로 공장 주변 일대가 그린벨트로 지정됐다. 기아는 자체 공장 부지임에도 이곳에 전기차 라인 등을 증개축하려면 수백억 원의 그린벨트 부담금을 물어야 한다. 연합뉴스




수도권에 공장을 둔 국내 가전 대기업 A사는 협력사와 생산라인 고도화 작업을 진행하다가 난관에 봉착했다. 하도급법상 기술 자료 규제 탓에 제조 공정 설계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하도급법(제2조)에서 설계 도면이 기술 자료로 분류돼 도면을 수정할 때마다 일일이 기술 자료 제공 요청서를 협력사에 서면으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설계 도면을 100번 수정하면 요청서도 100장을 작성해야 한다. 저가 공세를 펼치는 중국 경쟁사에 맞서기 위해 공정 고도화로 제품 생산성 향상에 나서려던 A사의 계획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A사의 한 관계자는 “요구서를 100번 발급하나, 한 번 발급하나 협력 업체 기술 보호에 대한 법적 효과는 동일하다”면서 “적시에 이뤄져야 할 제조 공정 혁신이 불필요한 행정 부담 탓에 속도를 내지 못하는데, 사실상 공장을 짓지 말라는 것 같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전 세계 주요 국가와 도시들이 제조업 부활을 외치며 기업 유치에 발 벗고 나서고 있지만 국내 제조업 현장에서는 규제가 거미줄처럼 얽혀 기업을 괴롭히고 있다.



산업 현장은 물론 학계에서도 규제의 큰 틀을 ‘원칙 허용, 예외 금지’의 네거티브 규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유야무야되고는 한다. 현 행정규제기본법상 네거티브 규제와 유사한 ‘우선 허용, 사후 규제’ 원칙이 있지만 신산업·신기술 분야에 제한적으로 적용될 뿐 기존 산업의 진입장벽이나 사업 활동 제한 규제에는 적용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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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 광명 오토랜드 공장 정문. 옛 소하리 공장인 이곳은 1970년에 자동차 공장으로 허가받아 착공됐지만 이듬해 행정 착오로 공장 주변 일대가 그린벨트로 지정됐다. 기아는 자체 공장 부지임에도 이곳에 공장을 증개축하려면 수백억 원의 그린벨트 부담금을 물어야 한다. 연합뉴스기아 광명 오토랜드 공장 정문. 옛 소하리 공장인 이곳은 1970년에 자동차 공장으로 허가받아 착공됐지만 이듬해 행정 착오로 공장 주변 일대가 그린벨트로 지정됐다. 기아는 자체 공장 부지임에도 이곳에 공장을 증개축하려면 수백억 원의 그린벨트 부담금을 물어야 한다. 연합뉴스


경기도 광명에 위치한 기아 광명 오토랜드는 1970년 착공됐지만 이듬해 행정 미비로 공장 일대가 그린벨트로 묶였다. 그런데 이곳이 왜 그린벨트가 됐는지 설명할 수 있는 공무원은 없다. 피해는 고스란히 기업의 몫이다. 기아는 전기차(EV) 전환 등 중요한 투자 결정을 할 때마다 까다로운 인허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자체 공장 부지로 허가받은 땅이지만 수차례 공장 라인을 변경하고 투자할 때마다 수백억 원의 환경보전 부담금도 낸다. 기아는 광명 2공장을 전기차 전용 공장으로 전환하기로 했지만 그린벨트 규제가 없었다면 광명 오토랜드에 대한 기아의 투자가 더 이뤄졌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이는 올해 설립 101주년을 맞은 BMW그룹의 뮌헨 공장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뮌헨 공장은 주변에 주거지가 조성돼 있지만 지방정부와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BMW의 전동화 거점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1980년대 공장 일대가 공업지역으로 묶여 부지 확장은 어렵지만 기존에 확보한 공간 안에서 생산 시설과 차종을 유연하게 바꿔나가고 있는 것이다.

한 반도체 공장의 실험실에서 연구원들이 가스 용량을 체크하고 있다. ‘고압가스 안전관리법 시행규칙’은 반도체 산업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규제로 생산라인 고도화에 나서는 기업들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진 제공=산업통상자원부한 반도체 공장의 실험실에서 연구원들이 가스 용량을 체크하고 있다. ‘고압가스 안전관리법 시행규칙’은 반도체 산업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규제로 생산라인 고도화에 나서는 기업들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진 제공=산업통상자원부


반도체 산업에서는 틈새 규제들이 기업의 생산 효율을 떨어뜨리고 있다. ‘고압가스 안전관리법 시행규칙’과 ‘소방시설 분리 공사 규제’가 대표적이다. 두 규제 모두 반도체 산업 현장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탁상행정의 전형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미 반도체 공장에서는 가스 성상별로 다른 환경의 캐비닛에 구분·보관하고 있고 저·고압가스를 한 장소에 보관해도 안전상 문제가 없다. 전문 업체만 소방시설을 짓도록 한 규제도 시장 동향에 따라 초 단위로 생산 시설 대응에 나서야 하는 반도체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 사례로 지적받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나 총리가 나서서 ‘킬러 규제’에 대해 한마디할 때 반짝하는 게 규제 개선”이라면서 “이런 식의 눈 가리고 아웅 식의 행정에 치를 떤다”고 토로했다.


서민우 기자·김기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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