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동향

[여명]여전한 인플레, 커지는 화폐착각

폭염·태풍에 추석 물가 심상찮은데

인플레 따른 화폐가치 하락 무관심

은행에 넣어둔 돈 원금보다 줄 수도

예산 불균형이 인플레 초래 경계를

한기석 선임기자한기석 선임기자




며칠 전 점심때 서울 진주회관에 가서 콩국수를 먹었다. 1만 5000원이라고 적힌 가격표를 보고 이 집에 온 지 몇 년 된 것을 알았다. 가장 최근 이 집에서 먹을 때가 1만 1000원이었다. “국수 주제에 1만 원이 넘는구나”라며 혀를 찼던 기억이 났다. 앞으로 또 몇 년 뒤에는 콩국수 한 그릇이 2만 원이 돼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신사임당 2장이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와 겹쳐 보일 수도 있겠다.



값이 오른 게 어디 콩국수뿐일까. 지난해까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각국의 최대 현안은 급등하는 물가였다. 한국의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7월 전년 대비 6.3% 올라 상승률이 정점을 찍었다. 소비자물가가 지난달 2.3% 올라 25개월 내 최저를 기록한 것을 두고 물가가 잡혔다고 말하기는 조심스럽다. 지난해 7월 최고로 오른 데 따른 기저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한국은행은 이달부터 물가상승률이 다시 높아져 연말까지 3% 안팎에서 등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물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유가는 불과 3개월 새 배럴당 60달러대에서 80달러대로 30%가량 올랐다. 추석 물가는 장마와 폭염에 태풍까지 겹쳐 심상치 않을 것이다.

지난해 물가가 많이 오른 큰 원인은 공급 차질에 있다. 코로나19가 퍼지자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막혔다. 원자재를 생산하던 인력이 공급되지 않으면서 원자재 값이 급등했다. 미중 갈등으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차질은 오른 물가에 기름을 부었다.



돈이 많이 풀린 것도 원인 중의 하나다. 코로나19 기간 세계 각국은 재난지원금 등의 명목으로 전 국민에게 현금을 뿌렸다. 우리나라도 4인 이상 가구에 100만 원을 지급한 것을 비롯해 수차례에 걸쳐 재난지원금을 살포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돈이 과잉 공급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부터다. 미국은 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양적완화에 나섰다. 기준금리를 0%로 내린 것만으로도 돈이 풀린 효과가 엄청날 텐데 이에 더해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뿌리기까지 했다. 일본은 아베 신조 총리 시절 중앙은행이 매입 한도 없이 채권을 사들이는 이른바 무제한 양적완화에 나서기도 했다. 이후 한 번도 제대로 회수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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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거나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리면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 최근의 인플레이션은 두 가지 원인이 합쳐졌으니 정도가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인플레이션을 물가 상승으로만 인식하지 화폐가치의 하락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 화폐착각이라고 한다. 화폐착각은 화폐의 명목가치를 구매력으로 오해하는 현상을 말한다.

화폐착각의 문제는 미국 경제학자인 어빙 피셔가 1928년 자신의 저서에서 처음 지적했다. 그는 실질임금 하락의 극단적 사례로 1차 대전 이후 독일을 들었다. 독일에서 인플레이션이 급격히 일어난 1923년 1월 노동자 임금이 1913년 수준의 500배 이상 뛰었다. 생활비는 같은 기간 그보다 훨씬 더 높은 1100배 이상 올랐다. 임금 상승률이 생활비 상승률보다 낮기 때문에 구매력은 하락했는데도 사람들은 임금이 오른 것에 만족했다.

이런 정도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일이 현재도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연간 소비자물가는 5.1% 올랐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해 8월 발표한 주요 대기업의 평균임금 인상률은 4.4%였다. 임금이 꽤 오른 것 같지만 실제로는 0.7% 하락했다. 월급 빼고 다 오른다는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적용된다.

걱정되는 것은 최근 은행 예적금이 급격하게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6월 예적금이 전달 대비 9조 5000억 원 늘었다. 평균 수신 금리가 5월 연 3.5%에서 6월 3.65%로 상승했기 때문이란다. 올해 물가가 3.65% 이상 오르는 순간 은행에 넣어둔 돈은 원금보다 줄어든다.

개인이 화폐착각에 빠지지 않으려면 근로소득으로 물가를 따라잡겠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피셔는 은행 예적금을 피하는 것이 지혜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피셔는 최악의 인플레이션이 예산 불균형에서 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된다고 충고했다. 그런 면에서 상반기에 세수가 줄어 나라 살림의 적자 규모가 83조 원까지 불어난 것은 큰일이다.

한기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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