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째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이었어요. 쿵하고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정신 없이 달려가 자지러지는 아이를 달래는데, 이마가 붓기 시작하더라고요. 30분이 채 되기도 전에 눈도 뜰 수 없을 만큼 얼굴 전체가 부어오르는 걸 봤을 땐 정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민수진(47)씨의 아들은 올해 스무살이 된 유전성혈관부종 환자다. 네 살 무렵 첫 증상이 나타났고 손·발·얼굴을 비롯해 사타구니·엉덩이까지 온몸으로 번졌다. 초등학생이 되자 내부 장기가 부어오르면서 수시로 복통·구토 증상이 찾아와 조퇴와 결석이 잦았다. 유전성혈관부종은 신체, 장기 구분 없이 부종이 발생하는 병이다. 단순히 '혈관이 붓는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다. 그보다는 '발작'에 가까웠다. 복강 내 장기가 부어오를 때 느끼는 고통은 산통에 비유되곤 한다. 연신 토하다 저혈압 쇼크가 까무라칠 정도다. 민씨 역시 열두 살 때부터 병명을 모른 채 비슷한 증상을 겪었기에 '내가 가진 어떤 병이 아들에게 유전되었구나'하고 짐작만 했다고 한다.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한 채 수많은 병원을 전전하는 동안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 기도 혈관 부으면 급성 호흡곤란 이어져…죽을 고비 수차례 넘기기도
그런데 중학생이 된 아들에게 후두부종이 나타났다. 기도에 부종 발작이 나타나면 물이나 음식을 넘기기는 커녕, 숨이 쉬어지질 않는다. 누군가 계속 목을 조여오는 것과 같이 끔찍한 상황을 기약없이 견뎌내야 한다. 20살 이후 후두부종으로 몇 번씩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는 민씨는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은 아들의 모습에 정말 죽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아들에게 두 번째로 후두부종이 찾아왔을 땐 증상이 지속된 이틀동안 민씨 역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한 채 날을 지새웠다. 급성 증상은 언제까지 지속될지 가늠하기 힘들다.
급성 호흡곤란으로 이어질 경우 뇌손상과 같은 심각한 후유증을 남길 수도 있다. 2018년 초 서울대병원에서 강혜련 알레르기내과 교수를 만나고서야 부종의 원인을 알게 됐다. 체내 염증을 조절하는 'C1 에스테르 분해효소 억제제'의 결핍이 원인인 ‘유전성혈관부종’. 인구 5만~10만 명당 1명 꼴로 발생하는 희귀질환인데, 국내의 경우 지난해까지 진단된 환자가 152명에 그쳤다. 유병률을 고려하면 300~1000명 가량 돼야 하지만, 질환 인지도 자체가 낮다 보니 숨은 환자가 많을 것으로 짐작만 하고 있다고 했다.
◇ 진단에만 30년 가까이 걸렸는데…치료제 도입도 하세월
민씨 역시 아들을 낳고 10여 년이 지나서야 병명을 알았으니 진단까지 30년 가까이 걸린 셈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급성 발작이 나타났을 때 체내에서 브래디키닌(bradykinin)의 혈관 확장 작용을 차단해 증상을 빠르게 가라앉혀주는 자가주사제 '피라지르'가 개발됐다는데, 국내에서는 처방이 불가능했다. 2014년 국내 허가를 받았지만 건강보험 적용이 되질 않아 출시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는 것. 제약사와 병원에 수없이 전화한 끝에 2018년 6월 비급여로 발매가 됐고, 그해 9월 건보 적용 길도 열렸다.
'엄연히 병명이 있고 약까지 나왔는데 이토록 오래 방황할 일인가.' 민씨는 투병 과정에서 만난 9명의 환자들과 뜻을 모아 이듬해 한국유전성혈관부종환우회를 조직했다. 4년새 회원이 60명으로 불어났고, 피라지르의 보험 처방 기준은 회당 1개에서 2개로 확대됐다. 유전성혈관부종 환자들은 인슐린처럼 처럼 복부에 주사하는 피라지르를 항상 소지하고 다닌다. 언제, 어디로, 어떻게 부종 발작이 나타날지 몰라서다.
◇ 2주에 한번 자가주사하는 ‘예방약’ 개발됐지만…국내 도입 기약조차 없어
최근 이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치료제가 있다. 브래디키닌의 생성 자체를 차단해 부종을 예방하는 '탁자이로'다. 유전성혈관부종 환자들은 심하면 한달에 수십 번씩 생명을 위협하는 발작이 나타난다. 피라지르는 회당 급여 처방 갯수가 제한돼 있다. 발작에 대비하려면 그만큼 자주 대학병원을 찾아야 한다. 예방약을 2주 간격으로 피하주사하면 일반인과 다름없이 생활이 가능하다. 탁자이로는 2018년 미국식품의약국(FDA)을 시작으로 스위스·일본·캐나다·영국·독일 등에서 허가를 받고, 급여 적용도 된다. 국내에서는 2021년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은 지 2년이 넘었지만 발매 전이다. 예방약은 캐나다에서 한 바이알당 2만 538달러(약 2670만 원·비급여)로 책정됐다. 2주 간격으로 1년간 맞을 경우 약값만 7억 가까이 든다는 얘기다.
예방약의 국내 도입 길이 열리려면 건보 적용 첫 관문인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경제성평가를 통과해야 한다. 경제성평가 면제가 담보되지 않는다면 사실상 건보 적용은 물론 국내 발매도 기약하기 힘들다. 이들은 윤석열 정부가 출범 당시 약속했던 '중증·희귀질환 보장성 강화'에 희망을 걸고 있다. 보통 신약의 건강보험 등재는 대체 치료제와 효과를 비교한다. 정부는 올해 1월부터 이러한 과정을 면제해 중증·희귀질환 치료제의 신속등재를 추진하기로 했다. 단, 대상 환자가 '소아'에만 한정된다.
◇ 전문가들 “희귀병 藥 접근성 개선 시급…경제성평가 면제 대상 확대돼야”
정부의 본래 취지와 달리 자칫 희귀질환 치료 기회가 더 낮아질지 모른다는 하소연이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유전성혈관부종 환자들의 치료 접근성 개선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목이나 후두가 부어 숨을 쉬지 못하는 응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투여하는 피라지르는 현재 2개까지만 급여가 된다. 갑작스럽게 하루에 주사제 2개를 써야 할지도 모르는 환자 입장에선 삶의 질은 물론 생명을 위협받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연출될 수 밖에 없다. 혈관부종 때문에 장이 부은 상태가 지속될 경우 괴사가 발생해 절단하는 경우도 있다.
강혜련 서울대병원 알레르기내과 교수는 "유전성혈관부종의 급성 발작을 예방할 수 있는 획기적인 신약이 개발됐지만 국내에서는 승인만 되어 있어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경제성평가를 진행할 경우 약이 전혀 없을 때 하는 수 없이 시행했던 수혈법과 비교해야 한다. 통과될리 만무하다. 응급약인 피라지르도 비슷한 연유로 미국보다 10년 이상 늦게 국내 도입됐다. 그는 "유전성혈관부종은 20~40대 젊은 연령대에서 많이 진단되는데 예방약을 쓰면 완전히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하다"며 "경제성평가 면제 대상을 소아로 일괄 한정하기 보다 더 많은 개선 효과를 볼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