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장이 27일 내놓은 “삼성에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발언에 대해 삼성 내부에서는 일종의 ‘작심 발언’이 나온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삼성을 감시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외부 기구 수장이 보기에도 삼성의 계열사별 독립 경영이 이제 득보다 실이 더 많은 한계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삼성의 한 고위 관계자는 “계열사 사장들에게 경영을 맡겨 놓으면 눈앞의 실적에만 얽매이면서 전체 숲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며 “그룹 전반을 아우르는 미래 비전을 내놓고 때로는 과감한 구조 조정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미래전략실만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이라고 강조했다.
당장 그룹의 규모가 계열사별 이사회에만 맡겨두기 어려울 정도로 커지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미전실 해체 직전인 2016년 말 기준 645조 2000억 원이었던 삼성그룹의 총자산 규모는 지난해 기준 914조 7700억 원으로 270조 원가량 불었다. 이 기간 매출도 271조 8800억 원에서 378조 7400억 원으로 증가했고 종업원 수 역시 25만 4031명에서 26만 7305명으로 늘었다. 컨트롤타워가 없다면 각 계열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사실상 파악하기 불가능할 정도다.
이 때문에 과거 미전실에는 △전략팀(재무·사업·M&A) △기획팀(대관) △인사지원팀(임원 인사) △법무팀 △커뮤니케이션팀(홍보) △경영진단팀(감사) △금융일류화지원팀(금융 전략) 등 7개로 구성된 팀에 최소 과장급 이상 ‘에이스’ 임직원 200~250명을 배치해 삼성을 진두지휘하는 역할을 맡겼다. 하지만 현재는 이 조직이 삼성전자 사업 지원 태스크포스(TF) 등 3개 TF로 간소화됐고 그나마 지원 인력마저 최소화돼 삼성 수준의 글로벌 기업을 ‘백업’하기에도 힘에 부친다는 것이 재계의 진단이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특히 미전실의 핵심 업무였던 진단 기능이 약화되면서 삼성 특유의 발 빠른 사업 조정이나 구조 조정이 느려졌다는 시각이 많다”며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일부 분야에서 경쟁 업체의 추격을 허용한 배경에도 미전실의 부재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발등에 떨어진 숙제인 삼성 지배구조 개편도 현실적으로 그룹 전체를 통할하는 컨트롤타워가 있어야 풀어낼 수 있는 숙제다. 현재는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지만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8.5%) 대부분을 강제 매각하도록 하는 일명 ‘삼성생명법(보험업법 개정안)’이 내년 총선 등을 계기로 언제든지 다시 추진될 수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물산 최대주주(18.1%)로 있으면서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고리를 통해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는데 만약 삼성생명법이 통과되면 이 연결 고리가 단숨에 약해지게 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지금처럼 컨트롤타워가 없는 상태에서는 삼성 계열사 중 어느 곳도 법적으로 지배구조 문제를 전담 처리할 수 없다”며 “내년 총선과 이후 대선 등 정치적 이벤트가 몰아닥치기 전에 지배구조에 대한 최소한의 방향이라도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도 이 문제에 대해 “삼성 지배구조를 법으로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무책임하다”며 “입법으로 단번에 해결하겠다는 것은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매듭을 한 번에 잘라서 그다음에 못 쓰게 되더라도 책임을 안 지겠다는 것과 같다”고 밝혔다.
삼성 전체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것도 전통적으로 미전실이 담당해오던 과제다. 1959년 이병철 창업회장 시절 비서실에서 출발한 삼성 컨트롤타워는 이후 ‘비서실-구조조정본부-전략기획실-미래전략실’로 이름을 바꾸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총수가 제시하는 비전을 구체화해 수백여 개에 이르는 국내외 계열사에 전달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해 갈등이나 전략 불일치 등을 일사불란하게 조정하는 것이 삼성의 핵심 성장 공식이었다고 보는 분석도 많다. 실제 삼성의 반도체나 바이오 진출 등 그룹 운명을 바꾼 결정 뒤에는 언제나 총수 직속 ‘브레인’ 조직이 있었다.
컨트롤타워 부활에 앞서 미전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씻어내야 한다는 지적은 물론 있다. 밀실 경영이나 정경유착 등을 확실히 끊어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미전실과 같은 조직의 장점을 더욱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