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9일 국무회의를 열어 내년 예산을 올해보다 2.8%(18조 2000억 원) 늘린 656조 9000억 원으로 확정했다. 총지출 통계를 작성한 2005년 예산안 이후 20년래 가장 낮은 증가율이다. 보조금 사업과 연구개발(R&D)에서 23조 원을 덜어내 2년 연속 20조 원 넘는 강력한 ‘긴축’을 이어갔다.
정부가 허리띠를 졸라매는 데는 폭증한 국가채무 탓이 컸다. 문재인 정부 기간에 늘어난 국가채무는 416조 원으로 이전 두 정부(이명박·박근혜)에서 증가한 것(351조 원)보다 많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000조 원 이상의 누적된 국가채무로 재정 상황은 여전히 어렵다”며 “예산 증가율을 0%로 동결하는 것까지 검토했다”고 밝혔다.
윤석열 정부의 재정 정상화 노력으로 내년 국가채무는 2019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인 61조 8000억 원 늘어나는 데 그친다. 지출 구조 조정으로 확보한 예산은 생계와 의료, 장애인·노인 지원 등 보건·복지·고용에 가장 많은 242조 900억 원이 쓰인다. 올해보다 7.5% 늘어난 수준으로 총지출 증가율(2.8%)을 크게 웃돈다. 추 부총리는 “민생을 고려해 약자 복지에 파격적으로 무게를 실었다”고 설명했다. 마약 및 묻지 마 범죄, 전세사기 등 민생 침해 범죄를 비롯해 수해 예방 등 안전 시스템 강화 예산에도 올해보다 6.1% 증가한 24조 3000억 원이 배정됐다.
다만 50조 원에 가까운 세수 부족은 재정 운용의 복병이다. 정부는 내년 국세수입도 33조 1000억 원 감소해 재정적자(관리재정수지)는 92조 원(3.9%)으로 올해의 58조 2000억 원(2.6%)보다 악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정부 여당이 재정준칙에서 고수한 관리재정수지 3%를 넘어서는 액수로 9월 초 세수가 재추계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
내년 국세감면율은 법정한도(14.0%)를 넘겨 16.3%(77조 1000억 원)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감면율이 법정한도를 넘긴 것은 2008·2009·2019·2020년 네 차례였다. 이필상 서울대 특임교수는 “세수 추계의 정확성을 떨어뜨리는 부문별 감세보다 경제 선순환을 일으키는 법인세 감면 등 세수 확충에 유리한 구조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날 의결된 내년 예산안은 다음 달 1일 국회에 제출된다.
정부 씀씀이 바짝 줄인다지만…
세수 급감에 나랏빚 1200조 눈앞
세수 급감에 나랏빚 1200조 눈앞
한국 경제에 낀 먹구름이 내년도 예산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정부는 내년도 국세수입으로 367조 4000억 원을 전망했는데 올해 세입예산(400조 5000억 원)은 물론 지난해(395조 9393억 원)보다도 뒷걸음질 친 수치다. 내년도 총지출 증가율이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했음에도 나라 살림을 보여주는 관리재정수지 적자 폭이 더 악화된 배경이기도 하다.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반도체가 불황의 긴 터널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만큼 내년도 세수가 예측치보다 더 적게 걷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는 내년에 77조 원이 넘는 세금을 깎아주며 감세 드라이브를 이어갈 예정이다. 국세 감면율 역시 16.3%로 법정 한도인 14.0%를 2.3%포인트 상회한다. 세금을 깎아주며 투자를 유도하고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의도지만 재정 건전성을 위해 허리띠를 강하게 졸라매는 만큼 세수 정상화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29일 기획재정부는 2024년도 예산안과 함께 발표한 ‘2023~2027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내년도 총수입을 올해 625조 7000억 원보다 13조 6000억 원 감소한 612조 1000억 원으로 잡았다. 세외수입과 기금수입이 각각 27조 9000억 원, 216조 8000억 원으로 올해보다 2조 9000억 원, 16조 5000억 원씩 늘어나지만 수입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국세수입이 33조 1000억 원이나 줄어들어서다.
구체적으로 보면 내년도 법인세수는 77조 6649억 원으로 올해 104조 9969억 원에서 26.0%(27조 3320억 원)나 감축될 것으로 추산됐다. 중국 경제 불안과 반도체 경기 회복 부진, 이에 따른 더딘 수출 개선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올해 기업 실적이 크게 둔화될 것이라는 전망과 같은 맥락이다.
반도체 부진에 내년 국세수입 367조
국가채무 61조 늘어 1196조 예상
국가채무 61조 늘어 1196조 예상
주식·부동산 등 자산 시장 불황에 양도소득세가 올해 세입예산보다 무려 24.6%나 감소될 것으로 예측되면서 소득세 역시 6조 원 이상 덜 걷힐 것으로 예상된다. 내수 침체에 부가가치세와 관세 역시 각각 1조 8000억 원씩 줄어든다. 상속증여세와 종합부동산세 수입도 큰 폭으로 쪼그라든다. 감소율은 14.4%, 28.1%로 올 7월 내놓은 감세 정책의 영향을 받았다. 정부는 세법개정안을 발표하며 앞서 혼인신고 전후 각 2년간 이뤄진 결혼 자금 증여에 대한 공제 한도를 5000만 원에서 1억 5000만 원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부족한 재정은 고스란히 나랏빚으로 돌아온다. 고강도 긴축에도 수입인 세수가 크게 줄어들며 국가채무가 올해 1134조 4000억 원에서 내년 1196조 2000억 원으로 61조 8000억 원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역시 50.4%에서 51.0%로 소폭 상승한다. 국가채무는 2025년 1273조 3000억 원, 2026년 1346조 7000억 원, 2027년 1417조 6000억 원으로 계속해서 불어난다.
정부는 내년도 세수 펑크와 대규모 적자를 감내하는 대신 2027년까지 중기 총지출 증가율을 3.6%로 잡았다고 설명했다. 총지출 증가율을 경상 성장률(4.4%), 총수입 증가율(3.7%)보다 낮게 유지하며 2027년 관리재정수지와 국가채무비율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각각 -2.5%, 53.0%에서 묶겠다는 것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건전재정 측면에서 총지출 증가율을 0%대로 동결하는 방안까지 검토했지만 민생경제 상황, 국민 안전을 위한 재정지출 소요 등을 고려해 고심 끝에 내년 큰 폭의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감당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당장 올해 대규모 세수 펑크가 예고된 상황에서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경우 정부가 공언한 건전재정 기조는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연말까지 지난해와 똑같은 수준의 세금을 걷는다고 해도 올해 세수는 세입예산(400조 5000억 원) 대비 44조 원 이상 부족하다.
정부의 감세 드라이브는 세수 부족에 대한 우려를 더 키운다. 상속증여세·종부세 감면뿐 아니라 정부가 깎아주는 세금을 뜻하는 조세지출도 크게 늘어난다. 내년도 예산안과 함께 국회에 제출되는 2024년 조세지출예산서에 따르면 내년도 국세 감면액은 77조 1144억 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관측된다. 국세 감면액과 국세수입을 더한 금액에서 국세 감면액이 차지하는 비율인 국세 감면율은 16.3%(잠정)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할 예정이다. 법정 한도인 14.0%보다 2.3%포인트 높다. 법정 한도는 직전 3개년 평균 감면율에 0.5%포인트를 더해 계산된다. 국세 감면율이 법정 한도를 넘긴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8·2009년과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았던 2019·2020년 네 차례뿐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국세수입 총액이 워낙 많이 줄다 보니 감면율 기여도가 80% 이상”이라고 전했다.
秋 "민생경제 고려 큰폭 적자 감내"
국세감면액 77조로 사상 최고 전망
당분간 세수부족 지속…긴축 불가피
국세감면액 77조로 사상 최고 전망
당분간 세수부족 지속…긴축 불가피
전문가들은 당분간 세수 부족이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 만큼 허리띠를 더 졸라맬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아직 물가가 잡히지 않았고 중국 등의 상황을 고려하면 세수 여건이 내년도에 더 악화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교수도 “당분간 세수 부족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긴축 기조는 불가피하다”며 “긴축과 함께 세입 결손이 심각한 만큼 공정시장가액비율 80% 환원 등 세제 정상화를 위한 세금 정책의 연착륙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