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의 작은 나사를 빼내는 손이 덜덜 떨렸다. 몇 개의 나사를 빼낸 후 케이블을 분리하고 배터리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찌이익, 접착제가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배터리가 떨어져 나오자 지켜보던 참가자들도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6월 말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서 친환경 활동가들이 주최한 ‘아이폰 배터리 교체 자가 수리 워크숍’이 열렸다. 전문가의 지도에 따라 직접 아이폰 배터리를 새것으로 갈아 끼우는 워크숍이다. 다른 기능은 멀쩡한데 오로지 배터리 성능 때문에 쓰기 어려워진 아이폰 10대가 현장에 속속 도착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생전 처음 보는 공구들을 앞에 두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폰 전문 사설 수리 기업인 서강잡스의 김학민 대표는 “수리 전문가들도 자칫 실수하는 경우가 있지만 제가 있으니 너무 걱정 말라”는 말로 참가자들을 안심시키며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폰을 분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열을 가하는 ‘히팅기’ 위에 올려두고 접착제부터 녹여야 한다. 주걱처럼 생긴 ‘헤라’와 조그만 드라이버로 조심스럽게 스마트폰 액정을 떼어낸다. 액정과 뒤판을 연결해주는 케이블이 다치지 않도록 세심한 손길이 필요한 대목이다. 액정을 떼어낸 상태에서 몇 개의 초소형 나사를 빼내고 나면 배터리를 들어낼 차례다. 배터리를 고정하던 테이프를 떼는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긴 참가자들은 마침내 새 배터리를 끼운 후 앞서의 과정을 거꾸로 반복하며 아이폰을 조립했다. 가장 빨리 작업을 마친 참가자의 아이폰 전원이 켜지는 순간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한 참가자는 “6년 쓴 스마트폰인데 앞으로 6년 더 쓸 수 있겠다”며 웃었다.
이날 워크숍을 주최한 활동가들은 제로웨이스트숍이자 다양한 친환경 캠페인의 중심지로 거듭난 서울 망원동 ‘알맹상점’ 운영자들이다. 성현 활동가는 워크숍의 취지에 대해 “재활용을 위해 소모되는 에너지가 많고 물건을 결국 더 낭비하게 되기 때문에 재활용 이전에 재사용이 중요하다”며 “수리를 하나의 권리로 주장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유엔 대학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버려지는 전자 폐기물은 2019년 기준 5360만 톤으로 5년 전보다 21% 증가했다. 그리고 이 중 수거·재활용된 비율은 17.4%에 불과하다. 전 세계의 전자 폐기물은 2030년 7400만 톤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폐기물 증가는 그만큼 새 제품이 만들어져 판매된다는 의미다. 더 많은 신제품이 제조·판매될수록 자원 소모와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증가한다. 결국 ‘오래 쓸수록 친환경’이며 ‘수리할 권리가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유럽환경국(EEB)에 따르면 유럽 내의 모든 스마트폰을 1년씩만 더 써도 2030년까지 매년 210만 톤의 탄소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 자동차 100만 대 이상이 1년간 배출하는 것과 맞먹는 양이다.
이 때문에 일부 국가에서는 소비자의 ‘수리할 권리’를 법으로 보장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는 2021년부터 전자제품에 ‘수리 가능성 등급’ 표기를 의무화했다. 수리가 쉬운지, 관련 정보와 부품이 원활하게 제공되는지 등을 기준으로 등급을 매겨 소비자들이 참고하도록 했다. 이에 맞춰 삼성전자도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과 우리나라에서도 ‘자가 수리 키트’를 판매 중이다.
애플도 같은 해 소비자들이 스스로 수리할 수 있도록 미국에서 ‘셀프 서비스 수리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그럼에도 애플은 최근까지 소비자들의 자가 수리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지난달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의회의 ‘수리할 권리 법안(SB 244)’ 통과를 촉구하며 입장을 바꿨다. 3월 수전 탈라만테스 애그맨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이 발의한 이 법안에는 스마트폰이나 PC 등 100달러 이상의 기기에 대해 소비자들이 스스로 수리할 수 있도록 제조사가 설명서·부품·공구를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와 함께 애플은 “수리권 법안으로 캘리포니아주의 모든 소비자들이 개인 정보를 보호하고 수리에 더 많은 접근권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박정음 서울환경연합 활동가는 “처음부터 수리해서 쓰기 쉽도록 제품을 설계·생산해야 하고, 소비자가 제품을 구매할 때 수리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어야 하며, 원하는 곳에서 수리를 요청하거나 직접 부품과 도구를 제공받을 권리까지 포괄적으로 수리권을 이해해야 한다”며 “디자인 단계에서부터 자원 순환 가능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도 2021년 11월 강은미 정의당 의원이 ‘수리할 권리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지만 제대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