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 년 뒤 인공지능(AI)이 인간처럼 생각하고 감정까지 느끼게 되면서 오히려 인류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다. 이때 전직 특수부대 요원이 아내의 실종에 AI가 개입됐다고 보고 전쟁에 뛰어드는데…. 다음 달 개봉하는 공상과학(SF) 영화 ‘크리에이터’의 도입부다. 이 영화는 고도로 발달한 AI에 대해 ‘인간적인가’ 아니면 ‘인간의 적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다음 달 개봉하는 SF 스릴러 영화인 ‘시뮬런트’도 AI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고 할 때 이를 막으려는 AI 통제 기관과 해커 조직의 대결을 다룬다. 심각한 교통사고로 인해 휴머노이드 로봇이 된 남편을 놓고 아내가 ‘복제 인간을 허가 없이 개조·수정하면 안 된다’는 규정을 어기고 해커를 통해 예전의 남편으로 되돌리려고 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SF 영화에서는 AI가 인류를 위협하거나 인간처럼 아예 감정을 느끼고 판단하려는 모습이 많이 등장한다.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이 2005년에 쓴 ‘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는 책을 통해 2029년에는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갖춘 컴퓨터가 나오고 2045년에 인간은 불멸의 존재가 된다고 예측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제는 AI가 인간처럼 추론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5월 마이크로소프트 연구팀의 논문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AI에 ‘계란 9개와 노트북 컴퓨터, 책, 유리병, 못을 안정적으로 쌓으라’고 한 결과 “일단 책을 받치고 계란을 가로세로 3줄씩 놓은 뒤 노트북를 올려놓고 유리병과 못을 놓으면 된다”는 답이 나왔다. 이는 AI가 자체 추론을 통해 성장하는 범용인공지능(AGI)에 접근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또 AI가 과거 체스, 바둑, 스타크래프트, 자동차 경주 비디오 게임에서 세계 챔피언을 제치고 승리한 데 이어 최근에는 실제 트랙에서 벌어진 드론 레이싱에서도 챔피언보다 앞서기도 했다. 스위스 취리히대 연구팀이 개발한 드론 조종 AI가 세계적 선수 3명을 상대로 총 25차례 개인 대결을 벌여 60%의 승률을 올렸다.
물론 이에 대해 “현재 챗GPT-4도 물리적인 세계를 이해할 능력이 없다” “어떤 경주 환경에서도 인간 조종사를 이기려면 기존 AI 기술로는 상당한 도전이 될 것이다” 등의 반박도 만만치 않다. 그만큼 AI 고도화까지 갈 길이 멀다는 것이다. 실제 AI가 적용되는 로봇·자율주행·드론의 경우 빅데이터 학습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것이어서 자체 추론을 통한 판단과 행동이 언제 현실화될지 예측하기 쉽지 않다.
사우디 네옴시티 진출을 모색하며 경기 성남 제2사옥에서 로봇 100대를 풀어 인간과의 시너지 효과를 모색하는 네이버조차 아직 커피·음식·서류 배달을 훈련시키는 수준이다. 네이버는 국내에서 초거대 AI 기반 대규모언어모델(LLM)의 선도자로 꼽힌다. 최우석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인공지능확산팀장은 “챗GPT 같은 초거대 AI 모델·서비스가 발전하면서 생활 곳곳을 다 바꿔놓을 것 같다”며 “하지만 아직은 산업·의료·생활·서비스 분야 등 국내외 AI 활용 사례를 수집하기에도 제한적인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현재는 AI가 인간을 보조하는 개념에서 발전하고 있는 단계라는 것이다. 우선 네이버의 경우 거액을 투자해 개발해온 LLM을 검색·쇼핑·광고·금융·창작·기업 등 다방면의 서비스에 접목하기로 했다. 하정우 네이버클라우드 AI이노베이션센터장은 “‘투자 제안서 초안을 써줘’라고 질문하면 서비스의 특징, 시장 분석, 목표, 예상 수익까지 초안을 제시하는 식”이라며 “회사 내·외부의 다양한 서비스 응용프로그램인터페이스(API)도 연결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챗GPT가 e메일·보고서·파워포인트 초안을 써주고 디자인·엑셀 기능까지 자동으로 해주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김정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초거대 AI는 텍스트·음성·영상을 동시에 생성하는 복합 AI로 진화 중”이라며 “먼 미래에는 AI와 메타버스(3차원 가상세계)가 결합한 가상 디지털 인간도 나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AI 발전을 위해서는 말뭉치(빅데이터)를 활성화하고 많은 비용이 드는 컴퓨터 그래픽처리장치(GPU) 성능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료 분야에서도 미국의 다빈치시스템처럼 외과의사가 전립선암 등을 수술할 때 로봇을 활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컴퓨터를 보면서 조정관을 움직여 환자의 몸속으로 들어간 로봇 팔로 수술해 복강경 수술을 대체하고 정확성을 높이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레보아이를 비롯한 수술 로봇 개발에 도전하고 있다. 차트 판독 과정에서 AI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 스웨덴 왕립 카롤린스카연구소 연구팀이 2021년 4월~2022년 6월 의료 AI 기업인 루닛의 유방 AI 영상 분석 솔루션을 활용해 여성 5만 5581명의 검진 결과를 분석했다. 루닛 AI와 전문의 1명이 함께 분석한 결과 수검자 1000명당 암 발견율이 4.3명으로 전문의 2명 또는 의료 AI 단독으로 판독했을 때 각각 4.1명을 발견한 것보다 정확도가 높았다. 비전 AI 업체인 라온피플의 이석중 대표는 “비전 AI는 반도체 등 생산 현장에서 불량 여부를 찾아내는 역할을 하고 치아 교정이나 스마트 교통 시스템을 구축할 때 긴요하다”며 “생성형 AI로 불량 데이터를 만들어 학습시키면 AI 품질을 단기간에 크게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AI는 연구 현장에서도 유용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KAIST 공동 연구팀이 AI를 활용해 수소연료전지 등에 쓰이는 비싼 백금 촉매보다 가격은 절반 이하로 낮추면서도 성능은 2배가량 높일 수 있는 합금 촉매를 개발한 게 대표적 사례다. 내비게이션 티맵(TMAP)을 운영하는 티맵모빌리티가 최근 대중교통, 택시, 주차, 렌터카, 전기차 충전, 킥보드 등 통합 서비스에 들어간 것도 AI 덕이다. 연내 도입하려는 식당·숙박 등의 예약 기능이나 운전 이력에 기반한 차량 구매·정비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 이종호 대표는 “빅데이터와 AI 모빌리티 기술이 있어 가능한 것”이라며 “개인 맞춤형 ‘AI 모빌리티 플랫폼’으로 진화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과기정통부는 2027년까지 양질의 말뭉치를 300억 토큰 규모까지 구축해 AI 고도화를 통해 국민 생활 밀착형 서비스(법률·행정사무·보건의료·교육), 산업 혁신(미디어콘텐츠·제조로보틱스·교통물류), 공공 서비스 혁신(국방·농림축수산·재난안전환경)을 꾀하기로 했다. 구체적으로 계약 문서의 불공정·위법 사항 탐지, 법령 해석·판결 분석, 의학 정보 탐색과 진료실·수술실 대화 자동 작성 및 영상 판독, 행정 문서 작성과 민원 대응, 교육 현장의 오탈자 체크와 의미 비교 등을 추진한다. 미디어콘텐츠의 영상·음성 합성과 스토리·캐릭터·미술 작품 생성, 메타버스 구축, 로봇 팔 물체 조립과 양팔 로봇 조작, 서빙·청소 로봇 주행과 조작 기술 개발, 교통 법규 위반 차량 자동 선별과 물류창고 수행 서비스도 내놓을 방침이다. 적의 표적 식별·추적과 국방 의사 결정 지원, 국가 하천 주변 위기 대응과 토지·산림 식생 변화 탐지, 반려동물과 수산 생물 질병 진단·예측에도 나서게 된다.
AI 허브 사업을 펴는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의 황종성 원장은 “빅데이터 활성화 측면에서 정부 안에서도 오픈소스를 쓰고 컴퓨팅파워를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하는 등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충희 엔씨소프트 실장은 “글로벌 빅테크와 차별화된 모델을 만들기 위해 기존 텍스트 위주에서 이미지와 음성 데이터까지 필요하고 데이터 저작권 문제도 풀어야 한다”고 했다. 최근 ‘AI 데이터 융합 네트워크’를 발족한 박윤규 과기정통부 2차관은 “정부가 AI 허브를 구축, 1조 원 이상 재정을 투입해 데이터를 만들어 왔지만 민간이 자발적으로 데이터를 만드는 미국 등 선도국과 격차가 클 수밖에 없다”며 “AI 허브에 자발적으로 데이터를 공유한 기업의 경우 인센티브를 주는 등 빅데이터 생태계 활성화에 나서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