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없이 1년 임기직을 정규직으로 전환’ ‘나이 등 자격 요건 미달 응시자를 합격 처리’ ‘규정 어기고 채용면접원을 100% 내부 직원으로 구성’
어느 중소기업이나 민간단체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려 헌법기관인 선거관리위원회의 민낯이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선관위의 지난 7년간 공무원 경력 채용을 전수조사해보니 이 같은 채용 비리 의혹이 353건이나 드러났다. 불과 52일간의 조사에서 밝혀진 의혹이 수백 건이라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실제 부조리의 규모는 얼마나 더 광범위하고 뿌리 깊을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지인들을 통해 정부기관·민간기업 등에 재직하는 감사·법무 담당자들의 의견을 물어봤다. 이들은 한결같이 요즘처럼 투명해진 세상에 중소기업에서도 보기 힘든 사례라고 입을 모았다. 한 기관의 감사 업무 담당자는 “정상적인 기관이었다면 기초적인 내부 감찰·감사만 해도 쉽게 걸릴 수 있는 수준의 비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런 초보적인 수준의 인사 부조리가 수년간 적발되지 않고 수백 건씩 저질러졌다면 몇몇 인사 담당자의 비리 차원이 아니라 오랜 기간 집단적·관행적으로 불공정 채용 행위를 내부적으로 눈감아줬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한 대기업의 준법감시인도 “이 정도로 규정을 대놓고 어기는 인사 비리는 사기업에서도 20~30년 전에나 볼 수 있던 사례”라고 지적했다. 그는 “감사·감찰이 제대로 실시되지 않거나, 실시됐더라도 윗선에서 적당히 무마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채용 담당자들이 갖지 않고서야 이렇게 대놓고 규정을 어기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한마디로 선관위에 대한 감시·통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이들의 평가였다.
선관위는 무더기 비리 의혹이 터질 때까지 어떻게 감사·감찰 시스템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 선관위가 대내외적으로 주창해온 ‘독립적 헌법기관’이라는 방패막이 덕분이었다. 중앙행정기관은 헌법에 그 설립 근거를 둔 헌법기관과 그렇지 않은 비(非)헌법기관으로 구분된다. 대한민국 헌법은 대통령·국무총리·감사원 등과 더불어 선관위의 설립을 규정하고 있다. 선관위는 이 같은 독립적 헌법기관으로서의 지위를 내세워 스스로 ‘언터처블’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선관위는 심지어 감사원이 채용 비리 사안에 대해 추진한 직무감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리로 제동을 걸고 있다. 이번 채용 비리에 대한 감사원의 직무감찰은 올해 7월 선관위가 헌법재판소에 청구한 권한쟁의 심판 절차로 인해 제동이 걸린 상태다.
그나마 이번에 권익위 조사를 통해 선관위의 채용 비리 실태가 드러났지만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 특혜 채용 의혹 수혜자들이 전·현직 선관위 간부 등의 자녀이거나 특수관계자였을지 여부를 밝히고 내부 감사 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도록 한 배후가 누구인지 밝혀야 하는 게 숙제인데 선관위가 이에 대한 자료 제출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게 권익위 측의 설명이다. 권익위는 강제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더 진상을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제 비리 발본색원의 공은 강제수사권을 가진 수사 당국으로 넘어가게 됐다. 정치적 부담은 있겠지만 수사 당국은 소명 의식을 가지고 사법적 정의를 세워야 한다. 정부와 수사 당국, 국회는 이번 사안을 단순히 개별 기관의 내부 인사 비리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선거는 대의민주주의의 기초이며 선관위는 그러한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하는 보루다. 그런 막중한 사무를 다루는 기관의 담당자들이 비리를 통해 불공정하게 채용됐다면 과연 공정한 선거 관리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를 방치한다면 결과적으로 선거제도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확산시켜 종국적으로는 민주주의 체제와 국가 존립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안을 국기문란 사건으로 규정하고 사법적·행정적·정치적 수단을 총망라해서 선관위 내부 비리를 발본색원해야 한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선관위를 비롯해 ‘독립기관’임을 표방하는 공공기관들이 준법감시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지 않도록 내부 통제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법률을 고쳐서라도 최소한 인사 문제에 대해서는 외부 감사를 받도록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