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오랜 영토 분쟁 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계 자치정부가 결국 해산을 선언했다. 아제르바이잔이 군사작전을 개시해 하루 아침에 이 곳을 장악한 지 8일 만이다. 종교와 문화가 다른 아제르바이잔에 삶의 터전이 함락되자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인종 청소’ 두려움을 호소하며 60% 이상이 본국으로 탈출했다. 이에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30년간 명맥을 이어온 아르메니아계 자치세력이 소멸 수순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계 자치세력은 28일(현지시간) 자칭 ‘아르차흐 공화국’을 연말까지 해산하겠다고 밝혔다. 자치세력은 앞서 19일 아제르바이잔이 군사 작전을 단행하자 하루 만인 20일에 항복을 선언했다. 이후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의 대탈출이 이어지며 자치정부 존속이 의미가 없어졌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아르메니아 정부에 따르면 28일 오후 8시까지 7만 6407명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본국으로 들어왔다. 주민 12만 명 가운데 63%가 삶의 터전을 버린 것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인들의 안전과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분쟁의 역사가 워낙 오래돼 이를 믿는 주민은 거의 없는 분위기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1917년부터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소련 치하에서 아제르바이잔의 자치구역이었기에 국제적으로는 아제르바이잔 영토로 인정받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실효적으로 존속해 왔다는 입장이다.
이에 양국은 1988~1994년과 2020년에 두 차례나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1차 전쟁에서는 아르메니아가 승리해 자칭 공화국을 세웠으나 2차 전쟁에서는 러시아 평화유지군 주둔을 전제한 휴전으로 전쟁이 끝났고, 갈등이 계속되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아르메니아는 기독교, 아제르바이잔은 무슬림 국가로 종교와 문화가 달라 ‘인종 청소’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1915~1917년 오스만제국에 의해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던 대학살의 역사도 두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오스만제국과 민족적 뿌리가 같다. 니콜 파니샨 아르메니아 총리는 이날 "향후 이 지역(나고르노-카라바흐)에 있는 아르메니아 민족은 모두 떠나게 될 것"이라며 "이것은 우리가 국제사회에 경고해 온 '인종청소' 행위이며 조국을 박탈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아제르바이잔 외교부는 파니샨 총리의 발언 이후 성명을 내고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려는 우리의 노력과 지역 재통합 과정을 방해하는 것"이라며 "주민들이 떠나는 것은 개인적 결정일뿐 강제이주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에는 “거주지를 떠나지 말고 다국적 국민들의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의 일부가 돼 달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30여년 간 존속해 온 자칭 공화국이 해산을 예고하면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계 자치세력은 사실상 소멸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 지역 분쟁에 개입할 여력이 사라지며 아제르바이잔이 공세에 나섰다는 평가도 있다.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도 24일 러시아를 겨냥해 "일부 파트너 국가들이 (휴전) 조약에 따른 의무를 포함해 외교 관계에서의 규범을 지키지 않으면서 우리의 취약성을 노출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파시냔 총리가 분쟁에 잘못 대처했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아르메니아에서는 이번 사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는 반정부 시위가 연일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