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엔저 현상이 지속되면서 이달 들어 시중은행에서 환전(원화→외화) 거래의 절반이 엔화 거래인 것으로 나타났다. 엔화 가치가 33년 만에 최저 수준까지 떨어진 만큼 저점을 찍었다는 인식에 엔화를 보유하거나 일본 여행을 위해 미리 환전해두려는 수요가 급증한 것으로 보인다.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이달 들어 16일까지 4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을 찾은 개인 고객이 원화를 엔화로 바꾼 환전 거래는 약 34만 5000건으로 전체 환전 거래(65만 7000건)의 52.5%를 차지한 것으로 집계됐다. 환전 거래 2건 중 1건은 엔화 매입 거래인 셈이다. 은행별로 보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많게는 4배까지 엔화 거래가 늘었다.
엔화 환전 건수는 원·엔 환율이 100엔당 900원대가 깨졌던 9월 28만 7000건을 기록한 후 10월 엔화가 900원대를 회복하면서 26만 6000건으로 소폭 줄었다. 당시 전체 환전 거래에서 엔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34% 정도였지만 이달 엔화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면서 거래가 급증했다. 개인 고객이 사들이는 엔화 규모는 9월 342억 6000만 엔(약 2993억 원), 10월 379억 9000만 엔(약 3318억 원)이었으며 이달 들어서는 16일까지 431억 4000만 엔(약 3768억 원)으로 꾸준히 불어나고 있다. 특히 이달은 절반 정도 지났지만 이미 지난달 거래량을 넘어섰다. 이달 거래 비중 역시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전체 환전액 대비 엔화 비중이 43%로 일년새 20%포인트나 확대되는 등 엔화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원·엔 환율은 6일 100엔당 867.38원을 기록해 종가 기준으로 금융위기가 있던 2008년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이후 내림세가 지속되며 16일에는 100엔당 856.8원으로 860원대마저 깨졌다가 이날 기준 873.08원까지 소폭 반등한 상태다. 업계에서는 역대급 엔저 현상에 일본 여행 수요가 증가하는 것은 물론 환차익을 기대하는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서윤 하나은행 CLUB1PB센터지점 부장은 “그동안 (외환 투자에) 관심이 없던 고객들까지 최근 들어 비과세 혜택과 리스크 헤지(위험 분산) 차원에서 엔화 환전을 문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꼽혀온 엔화가 강세로 전환할 경우 채권 등 다른 안전자산과 비교해 더 큰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엔화의 약세 흐름이 지속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엔화 약세를 불러온 주요 원인인 일본은행(BOJ)의 완화 정책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긴축 통화정책을 이어가는 가운데 일본이 내년까지 홀로 마이너스 금리 기조를 가져갈 경우 원·엔 환율이 900원을 밑도는 상황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 부장은 “BOJ는 여전히 내년 3월까지 금리 인상은 없다는 시그널을 보내고 있어 엔고 현상이 오더라도 내년 3월 이후 점진적으로 가치를 회복할 것”이라며 “다만 미국채 등 다른 안전자산 대비 엔화 투자의 매력이 커보이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