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해외 순방시 경제사절단 등의 자격으로 수행했던 국내 대기업 총수들이 이번에는 국내 정치 이벤트 성격이 짙은 행사에까지 불려가면서 경제계 안팎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기업 총수의 경제사절단 수행은 대한민국의 무역 영토를 넓히고 국내 투자 유치를 위한 국익 차원의 행보이지만 국내 행사에까지 대거 동원되는 것은 과도하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공급망 위기 속에서 내년 경영 계획을 짜야 하는 연말연시의 중차대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대통령실이 기업인의 참여 행사를 꼭 필요한 수준에서 최소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6일 윤 대통령은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부산 유치가 불발된 후 처음으로 부산을 찾아 시민들의 성원에 사례하고 각종 지원책을 발표했다. 특히 윤 대통령은 이날 참석한 경제인들과 함께 부산 국제시장을 찾아 시민들과 소통하며 민생 현장을 점검했다.
이날 윤 대통령의 시장 방문에는 재계 총수들이 함께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재원 SK수석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조현준 효성 회장, 정기선 HD현대 부회장 등이 참석했다. 윤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이 정장 차림으로 한 분식집 앞에서 나란히 서서 떡볶이와 빈대떡을 나눠먹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윤 대통령은 자신의 젓가락으로 빈대떡을 집어 이 회장 그릇에 옮겨주기도 했다. 이 회장은 “맛있네요”라며 화답했다.
윤 대통령은 이후 시장 내 돼지국밥집을 방문해 재계 총수 및 부산 기업인들과 함께 오찬을 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총수들과 기업의 애로 사항을 경청했다. 윤 대통령이 재계 총수들을 대동해 민생 현장인 시장을 방문하는 극히 이례적 이벤트를 연 것은 부산에 대한 투자 지원 의지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윤 대통령이 이번 부산행에 기업 총수들과 자리를 함께한 것은 엑스포 유치를 위해 애썼던 노고에 감사를 전하려 한 차원으로 풀이된다. 다만 시기와 장소·방식 등을 감안할 때 정치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적지 않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총수가 대통령 일정에 반나절만 동행해도 그 과정에서 (의전 준비 등을 위해 해당 기업에서) 만들어지는 보고서가 수백 장에 이를 것”이라며 “기업의 리소스(자원)가 낭비되는 것은 물론이고 중요한 정책적 결정이 지연되는 일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이 재계 총수들을 동원한 소위 ‘편대비행’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해외 순방 때마다 경제사절단으로 기업인들이 동행했다. 올해만 윤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은 11차례 이상 만났다. 1월 대한상의·중기중앙회 신년회처럼 대통령이 참석해 행사를 빛내는 방식뿐 아니라 해외 순방에만 6차례(1월 UAE 순방, 3월 ‘한일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 4월 미국 방문, 6월 프랑스·베트남 순방, 10월 사우디·카타르 순방, 11월 영국·프랑스 순방) 동원됐다.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이 회장이 공식적으로 만난 횟수만 17회다.
그나마 해외 순방을 통해 국가 위상을 높이는 효과를 냈다지만 전통시장 방문 같은 국내 정치 행사까지 재계 총수들을 동원하는 방식은 민주화 이후 정경 분리 원칙을 지켜온 관례에 비춰볼 때 과도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한 재계의 또 다른 고위 관계자는 “이전 정부에서는 대통령과 총수가 10차례 전후로 만났다”며 “윤 대통령과 기업인들이 자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 기업인을 위해주고 기업을 챙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기업인들에게 의지를 많이 한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해 전 세계를 누볐던 기업인들을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로 반성하는 자리까지 부른 것 또한 의전 판단 미스”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