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피플

넥타이·와이셔츠 벗고 '막노동꾼' 되다

■ <나의 막노동 일지> 나재필 작가

27년 기자생활…막노동으로 인생 2막

"땀의 대가 인정해주는 숭고한 직업"


막노동,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는 노동’이다. 진입장벽이 낮고 하루 일당도 15만~20만 원이 넘지만 동시에 고되고도 험한 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은퇴 중장년이 쉽사리 선택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러나 드물게도 어려운 길을 고르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라이프점프는 기자로서의 인생 1막을 뒤로 하고 막노동으로 인생 2막을 연 나재필(57)씨를 지난 6일 전화 인터뷰로 만났다.

나재필 씨가 충북 음성에서 현장 사진을 보내왔다. / 사진제공 = 나재필나재필 씨가 충북 음성에서 현장 사진을 보내왔다. / 사진제공 = 나재필





시간이 지날수록 회사 내의 압박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곪았던 고름이 터지듯 쌓였던 스트레스가 터졌다. 나 씨는 2018년 욱하는 마음에 사표를 냈다. “은퇴 후를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뭐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죠. 나를 원하는 곳도 있을 줄 알았어요.”

인생 1막이 한순간에 마무리됐다. 하지만 해방감은 잠시뿐. 회사는 전쟁터, 밖은 지옥이라는 말처럼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던 6개월간의 시간을 ‘시베리아 냉동고에 갇힌 신세 같았다’고 회상했다.

“막노동은 경력도, 삶의 이력도, 학벌도 따지지 않습니다.”


주린 배를 라면으로 채우던 가난한 청년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따뜻하면서도 배부른 라면을 대접할 수 있는 작은 라면집을 꿈꿨다. 한식 조리사 자격증에 두 번 도전했다. 하지만 모두 1, 2점 차로 낙방했다. 이후 대기업 식당 보조 일을 얻었다. 평소에 설거지와 요리를 즐겼던 터라 자신만만했다. 그에게 주어진 업무는 하루 1500~2000명분의 설거지. 하루 11시간을 꼬박 식판, 솥과 씨름하니 퇴행성관절염과 손목터널증후군이 찾아왔다. 지병을 몇 개 더 얻고 3개월 뒤 주방을 떠났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은 스스로 퇴락의 길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발들인 곳이 막노동이다. 그는 지난해 기술자를 보조하며 일하고 배우는 ‘조공’이 됐다. “막노동판은 경력도, 삶의 이력도, 학벌도 따지지 않는 무채색의 열린 공간이더군요.” 군대에 막 입대한 청년처럼 아무것도 몰라 두려웠다. 하지만 현장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 일주일 정도가 지나니 새로운 일에 젖어 들었다.


막노동, 땀의 대가를 인정해 주는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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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마지막 종착지 같았어요.”

막노동하는 삶으로 접어든 그는 사실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숨만 쉬어도 한 달 400만 원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체면, 허울과 위선을 차릴 새가 없었다.

일이 익숙해질 즈음 그는 막노동과 노동자들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뜯어고쳤다. 그는 막노동을 ‘닥치는 대로 하는 노동’이 아니라 ‘땀의 대가를 인정해주는 숭고한 직업’이라고 정의한다. 현장에서 만난 동료들에게서는 삶의 진정성을 배웠다. 기자 때의 습관으로 일상을 기록했다. 그 채록을 모아 지난달 ‘나의 막노동 일지’를 출간했다. 책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일하는 노동자들에 보내는 경외의 박수다.

나재필 씨는 막노동판을 “경력도, 삶의 이력도, 학벌도 따지지 않는 무채색의 열린 공간”으로 비유한다. / 사진제공 = 나재필나재필 씨는 막노동판을 “경력도, 삶의 이력도, 학벌도 따지지 않는 무채색의 열린 공간”으로 비유한다. / 사진제공 = 나재필


사무실이 아닌 현장이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제2의 인생을 맞이한 것일 뿐, 예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며 “폼나고 멋있는 일만 찾다 보면 재취업은 어렵다”고 말했다. 그가 일하는 현장에도 사장, 경찰 출신 등 다양한 배경의 중장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다만 나 씨는 은퇴를 앞둔 중장년에게 ‘살얼음 위를 걷는 심정으로 미래를 예비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중장년이 양질의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선택의 폭도 좁은 현실 탓이다. 나 씨도 은퇴 전으로 돌아간다면 토목, 전기 기술이나 지게차, 굴착기(포클레인)를 배워두고 싶다.

‘닥공(닥치고 공격)’의 자세도 필요하다. 인생 1막에 넥타이를 맸다고 2막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평균수명을 따져보면 한평생 2~3개의 직업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때로는 ‘삽질’도 해야 한다.

그가 막노동에 뛰어든 것은 가장에게 주어진 숙제를 푸는 것과도 같다. 아버지, 남편, 자식으로서 떳떳하고 싶은 마음이 그를 매일 아침 현장으로 이끈다. “노동자들은 가족과 사회를 지탱해 가는 숨은 영웅이죠. 저도 100원을 벌더라도 아들이자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싶어요.” 그러니 막노동을 한다는 것에 안타까운 시선을 보낼 필요도, 인생 2막의 직업으로 선택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그는 말한다.

정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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