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벨로퍼(개발사) 입장에서는 국내 해상풍력 생태계 조성은 못 본 체하고 저가 중국산 제품을 사용하는 게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개발사의 이런 합리적 선택이 신재생에너지 보급을 위한 국가 보조금을 중국에 갖다 바치는 셈이라는 점입니다.”
익명을 요청한 해상풍력 기자재 업체의 한 관계자는 “중국 기업이 하나둘 한국에 법인을 세우더니 우리 절반 수준의 납품 가격을 책정한 견적서를 뿌리고 있다”며 이같이 토로했다. 그는 “중국이 저가 공세로 국내 태양광발전 설비 시장을 잠식한 게 엊그제인데 이제는 해상풍력이 타깃이 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글로벌 해상풍력 시장에서 중국이 다크호스로 급부상하고 있음은 실적에서 드러난다. 중국은 올해 해상풍력 발전설비 용량이 31.8GW(9월 누적 기준)로 세계 1위다. 2020년까지 세계 최대 풍력발전 생산지가 단연 유럽이었음을 감안하면 괄목상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20년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2030년에 자국의 탄소 배출이 정점을 찍고 2060년 탄소 중립을 실현하겠다는 ‘쌍탄(雙炭) 목표’를 제시한 뒤 재생에너지 발전설비 증설에 공을 들인 게 주효했다는 관측이다.
특히 자국 시장에서 건설 경험을 축적한 중국 해상풍력 기업들은 이제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특히 지리적으로 가깝고 원전을 보완할 신재생에너지 발전원으로 해상풍력을 점찍은 한국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해상풍력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허가를 받은 해상풍력 발전 용량은 약 20.7GW(68개 프로젝트)에 달한다. 그러나 지난해까지 실제 누적 해상풍력 설치량은 146㎿에 불과했다. 앞으로는 해가 갈수록 해상풍력 설치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에너지공단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 풍력 고정가격계약을 통해 사업자의 안정적 수익을 보장하는 동시에 사업자 간 선의의 가격 인하 경쟁을 유도하겠다는 구상으로 알려졌다. 20년간 고정가격에 생산된 전기를 사들이기로 정부와 공공기관이 확약하면서 개발사들은 안심하고 수조 원대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올해 입찰상한가격을 비공개 처리하면서 가격 경쟁력이 낙찰 여부를 더 크게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평가 지표는 입찰 가격 60점, 산업·경쟁효과 16점, 주민 수용성 8점, 계통 수용성 8점, 국내 사업 실적 4점, 사업 진행도 4점 등으로 구성돼 있다. 지난해와 달리 중국산 해저케이블을 비롯해 터빈·블레이드까지 들여와 발전 단가를 낮추는 방식으로 입찰 가격을 떨어뜨린 프로젝트들이 등장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실제 전남 영광 ‘낙월해상풍력’ 프로젝트를 공동 추진 중인 명운산업개발과 태국 비그림파워는 약 6400억 원에 독일 벤시스의 터빈을 사용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중국 최대 풍력 업체 골드윈드가 2008년 벤시스를 인수하면서 벤시스는 사실상 중국계로 분류된다. 명운산업개발과 비그림파워코리아는 해상풍력 발전단지와 송이도변전소를 연결하는 내부망 160㎞는 대한전선에, 외부망 29㎞(2회선)는 중국 전선 제조 업체 형통광전에 나눠 맡길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명운산업개발 측은 “어려운 협상 끝에 태국 비그림파워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며 “국내외 다양한 터빈을 고려한 끝에 가장 비용 효율적인 독일 벤시스의 터빈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외부망에 대해서는 아직 공급처를 확정하지 못했다”며 “고금리 등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 다각도로 자금 조달을 추진 중”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해럴드 링크 비그림파워 대표는 지난달 7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열린 인베스트 코리아 서밋에서 방문규 산업부 장관과 만나 5억 달러 규모의 투자신고서를 제출하는 등 국내 해상풍력 투자를 공식화한 바 있다.
국내 업체들은 올해가 100조 원에 육박하는 국내 해상풍력 시장을 중국에 열어주는 원년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KOTRA에 따르면 중국은 해상풍력과 관련한 전후방 산업에서 탄탄한 밸류체인을 갖췄다. 당장 부품별 중국산 점유율만 봐도 블레이드(60%), 발전기(65%), 기어박스(75%) 등에 이른다.
국내 업체들은 정부에 해상풍력 생태계를 육성할 특단의 대책을 주문하고 있다. 일단 중국산보다 적정가에 품질까지 좋은 국산을 우대하도록 평가 지표를 개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장길수 고려대 교수는 “태양광발전 사례에서 보듯 저가 입찰 경쟁에 따라 중국산이 국내 시장을 장악하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