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애가 살아있다면 내 가족에게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집니다. ”
지난해 중학교 2학년 아들을 소아당뇨(제1형 당뇨) 합병증으로 갑작스럽게 떠나보냈다는 황유순 씨는 “(태안 일가족 비극을 기사로 접하고)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이모 군(15)은 생후 2개월 때 1형 당뇨병 진단을 받았다. 아들의 투병 당시 황 씨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낯선 병을 케어해야 하는 데 따른 막막함도 치료비 부담도 아니었다. 황 씨는 “아픈 아이를 향한 주변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죽을 고비를 수 차례 넘겼는 데도 병원 가기 전까지 멀쩡했던 아들이 당뇨병성 케톤산증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충남 태안에서 1형 당뇨를 앓던 9세 딸과 부부가 숨진 채 발견돼 안타까움이 커지는 가운데 관련 비극을 막을 법안이 3년째 국회에 계류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 젊은 당뇨병 환자 14만명…지원 법안 발의됐지만 폐기 위기
16일 국회 및 의료계 등에 따르면 이명수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 발의한 소아·청소년·청년 당뇨병 환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지난 2021년 상정돼 올해 3월과 8월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다뤄졌지만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에 반대에 부딪쳐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당뇨병은 크게 1형과 2형으로 나뉜다.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당뇨병은 비만, 스트레스, 운동부족, 서구화된 식습관 등의 요인으로 인슐린 저항성(체세포가 인슐린에 반응하지 못하는 현상)이 생기는 2형이다. 최근 태안 일가족 비극을 불러 일으킨 1형 당뇨병은 자가면역 기전으로 췌장의 베타세포가 파괴되어 발생한다. 인슐린을 전혀 분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평생 외부에서 인슐린을 주입해야 하는데 주사 시기를 놓치면 고혈당이 악화되어 당뇨병성 케톤산증, 고삼투압성 고혈당 증후군 같은 급성 합병증이 나타나 사망할 수 있다. 반대로 체내 요구량보다 많이 주입하면 저혈당에 빠져 실신하거나 최악의 경우 사망하기도 한다.
신병을 비관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한국소아당뇨인협회에 따르면 오랜 기간 1형 당뇨병을 앓았던 A양(29)은 콩팥 기능이 악화돼 혈액 투석을 받아야 하는 처지를 비관해 지난 2022년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협회는 최근 몇년새 당뇨 합병증 또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숨진 젊은 당뇨병 환자를 최소 6명으로 파악 중이다. 한국1형당뇨병환우회 회원 100여명은 15일 세종시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충남 태안에서 9살 딸의 소아당뇨(1형 당뇨병)를 치료하느라 어려움을 겪다 극단적 선택을 한 일가족의 비극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며 울분을 토했다. 1형 당뇨병이 수술을 통해 완치될 수 없고 평생 짊어지고 갈 질환임에도 불구하고 질환에 대한 오해와 편견 때문에 고통과 아픔에 홀로 신음하는 환자와 가족들이 많다는 게 이들의 얘기다.
◇ 복지부, 중복 지원 이유로 ‘젊은 당뇨병 환자 지원법’ 신설 사실상 반대
소아·청소년·청년 당뇨병 환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안에는 1·2형과 관계없이 만 34세 이하 당뇨병 환자를 위한 교육 및 관리 시스템 구축 등 지원을 강화하자는 내용이 담겼다. 약 14만 명에 달하는 젊은 당뇨병 환자 대부분이 질환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학업, 취업, 근로 등 경제활동과 사회적 역할 확대에 지장을 받고 있으므로 국가 차원에서 실질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취지다.
그러나 2021년 11월에 제출된 소아·청소년·청년 당뇨병 환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안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복지부와 기획재정부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당뇨병이 ‘심뇌혈관질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대상에 포함되므로 별도 법안 신설 시 실익이 없다는 이유다. 소아·청소년·청년 당뇨병 환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며, 다른 환자와의 형평성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도 들었다.
주무부처인 복지부가 사실상 법안 제정을 반대한 것이다. 복지부는 작년 8월에 열린 복지위 제2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도 건강보험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라며 젊은 당뇨병 환자를 지원하는 법안을 신설하는 데 대해 난색을 표했다. 당시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은 “이미 건보에 본인부담상한제도가 있고 기타 여러 가지 장치에 대한 보완책이 4분기 중 건정심 보고를 거쳐 시행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라며 “개별법을 신설하는 데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 의견을 드린다”고 발언했다.
최근 태안 일가족 비극을 계기로 1형 당뇨병에 관한 지원이 미흡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복지부는 “2월 말부터 19세 미만 1형 당뇨 환자가 사용하는 인슐린 펌프 등 당뇨관리기기 구입 비용에 대한 건강보험 지원을 대폭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제30차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인슐린 펌프 등 당뇨 관리기기와 관련한 본인 부담률을 기존 30%에서 10%대로 낮추는 방안을 확정했는데 시행 시기를 한 달 앞당기겠다는 것이다.
정작 환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이미 작년 12월에 결정된 내용을 되풀이한 것일 뿐 한 달 빨리 시행한다고 큰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의료계와 환자단체는 건보 재정으로 일부 비용을 부담해주는 정도로는 당뇨병 환자와 가족들이 겪는 어려움을 덜어줄 수 없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상급종합병원 등에서 치료 받을 때 본인 부담률이 낮아질 수 있도록 1형 당뇨병을 ‘중증 난치질환’으로 지정하고 별도의 치료·관리 수가가 마련돼야 한다는 요구다.
◇ 의료계·환자단체 “1형 당뇨, 국가가 책임져야…중증난치질환 지정 요구도”
김재현 삼성서울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교수는 “췌장기능이 심각하게 저하되거나 아예 없는 당뇨병 환자는 인슐린 투여가 반드시 필요한데 디지털펜·인슐린펌프 등 4등급 의료기기는 환자가 다루기에 위험도가 매우 높다”며 “지속적인 교육과 관리 과정 없이 환자 스스로 이러한 기기들을 구입하고 사용하게 하면 건강보험 재정만 낭비하고 환자 건강도 악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속적인 환자 교육과 관리가 필요한 혈당관리 기기 관련 수가를 제정하고 요양비 제도가 아닌 요양급여를 통한 기기값 지원이 필요하다는 게 의료계 입장이다. 환자단체는 1형 당뇨병을 췌장장애로 인정해 달라며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대한아동병원협회도 15일 성명을 내고 “소아당뇨 환자 일가족 사망은 예견된 참극으로 일종의 사회적 타살”이라며 “만 18세가 될 때까지 만이라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거들었다. 협회에 따르면 미국은 의료 보험이 1형 당뇨병 환자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장애인법으로도 보호하고 있다. 협회 관계자는 “1형 당뇨병은 만성 질환이라 가계에 부담이 크고 진료 특성상 치료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의료 인력도 부족해 환자를 돌보려는 기관이 줄고 있다”며 “한국도 소아 당뇨 환자가 장애인 혜택을 받도록 하는 등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지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궁극적으로는 어렸을 때 당뇨병이 발병한 젊은 환자를 위한 법적 지원 근거가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한내분비학회 보험이사를 맡고 있는 김대중 아주대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교수는 “심뇌혈관질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당뇨병이 포함되어 있어 중복의 소지가 있다는 복지부와 기재부의 의견은 명백히 서류상으로만 검토를 한 것으로 보인다”며 “해당 법률에 입각한 당뇨병 관리사업은 대부분 중년 및 노년 당뇨병 환자 대상으로 젊은 당뇨병 환자는 배제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어떤 유형이건 당뇨병을 앓는 소아·청소년·청년은 일종의 취약계층에 해당하므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법 제정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호주, 캐나다, 유럽 등 해외 선진국에서는 정부가 소아·청소년 및 청년 당뇨병에 대해 별도의 관리전략과 정책을 수립하고 관련 법률을 제정했다. 우리 정부는 요양비 급여를 확대하고 건강보험으로 촘촘히 챙겨주면 된다고 얘기하지만 그보다 복지로 풀어야 할 것이 많다”며 “정부가 무심한 대응으로 일관한다면 똑같은 비극이 곧 또 되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