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국이 고금리·고물가 속에서도 2.5% 성장하는 동안 한국은 1.4% 성장에 만족해야만 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대중(對中) 수출 회복이 기대했던 것보다 느리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특정 산업과 일부 국가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독이 된 셈이다.
한국은 기준금리가 3.50%로 미국(5.25~5.50%)보다 낮은데도 내수마저 얼어붙고 있다. 일본 성장률이 전망치(1.8%)대로 발표된다면 1998년 외환위기 이후 25년 만에 처음으로 한일 성장률마저 역전된다. 미국과 일본은 주가지수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데 코스피는 연초부터 부진에 빠진 것도 이러한 경기 흐름을 반영한 결과다.
올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주요 8개 글로벌 투자은행(IB)의 내년 한국 성장률 전망치 평균은 2.1%, 미국은 1.3%다.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을 2.1%로 전망하고 있으나 반도체 등 정보기술(IT)을 제외하면 1.7%에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수출만 바라보며 미국이 먼저 금리를 내릴 때까지 버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만큼 중동 사태나 미중 무역 분쟁 등 지정학적 위기가 확대되면 성장률은 즉각 고꾸라질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한미 성장률 역전 현상이 단기간에 그칠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골드만삭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2030~2079년 성장률이 1.2~1.7% 수준으로 1%대 초반 수준의 성장이 지속된다. 반면 한국은 2030~2039년 1.4%에서 2040~2049년 0.8%, 2050~2059년 0.3%로 급격히 하락하더니 2060~2069년 이후로는 역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한국 성장률이 빠르게 꺾이는 것은 생산성 하락으로 잠재성장률 수준 자체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잠재성장률은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자본·노동 등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최대 성장률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24년 2.00%로 2016년(2.84%) 대비 큰 폭 낮아졌다. 반면 미국은 2016년 2.02%에서 2024년 1.97%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대로면 잠재성장률마저 미국에 따라잡힐 가능성이 커진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치권은 성장의 발목을 잡는 일만 거듭하고 있다. 수출입은행의 자본금을 15조 원에서 35조 원으로 증액하는 법안이 발의됐으나 처리되지 않아 폴란드 무기 수출에 차질이 우려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사용후핵연료 저장 시설 건설과 관련한 ‘고준위방폐물특별법’도 방치돼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유예가 불발돼 5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 시행하기로 하면서 소상공인마저 옥죄고 있다.
정치권은 빨리 풀어야 할 숙제를 모두 4월 총선 이후로 미룬 상태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규모가 133조 원이 넘는데 본격적인 구조조정 없이 금리 인하를 기다리며 만기 연장만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 번 돈으로 이자도 낼 수 없는 좀비기업 비중이 42.5%를 기록하며 사상 최대로 늘었으나 이 역시 방치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가 경제 전반의 생산성이 높아지려면 생산성이 낮은 부분을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김진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장기적으로 인구 감소에 대한 대책을 세우면서 중기적으로 규제 개혁 등을 통해 사회 전반의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