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 농단’의 핵심 책임자로 지목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5일 1심 선고에서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다만 법원은 '강제징용 재판 개입' 등 대부분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6-1부(김현순·조승우·방윤섭 부장판사)는 이날 임 전 차장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검찰이 2018년 11월 임 전 차장을 기소한 지 5년2개월여 만에 나온 법원의 결론이다.
이날 법원은 △전교조 법외노조 처분 소송에서 고용노동부의 소송 서류를 사실상 대필해준 혐의 △홍일표 전 자유한국당 의원의 형사재판 전략을 대신 세워준 혐의 △통합진보당 지역구 지방의원에 대한 제소 방안 검토를 지시한 혐의 등 일부 혐의에 대해 직권남용에 해당한다며 유죄로 판단했다. 각급 법원 공보관실 운영비 명목의 예산 3억 5000만 원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도 대다수가 유죄로 인정됐다.
재판부는 “유죄로 인정된 내용을 보면 사법부의 독립을 수호하고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국가가 부여한 사법행정권을 사유화했다”며 “특정 국회의원과 청와대에 이용한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판시했다. 이어 “이런 범죄로 인해 사법부의 다른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이념이 유명무실하게 됐다”며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국민 신뢰가 저하됐을 뿐 아니라 법원 구성원에게도 커다란 자괴감을 줬다”고 질타했다.
하지만 법원은 ‘직권 남용’과 관련된 대다수의 혐의에 대해서는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양 전 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가 '권한이 없으니 남용도 없다'고 판시한 법리 해석과 유사한 시각에서다. 재판부는 일본 기업 측 입장에서 재판 방향을 검토하고 의교부 의견서를 미리 건네받아 감수해준 혐의에 대해 “사법부의 대행정부 업무로서 필요성과 상당성이 인정되고 재판 독립을 침해했다고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특정 법관에게 인사 불이익을 주기 위한 ‘사법부 블랙리스트’ 작성·실행 가담 혐의에 대해서도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거나, 일부 해당한다 해도 행정처 심의관 등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켰다고 볼 수 없다”며 무죄로 결론 내렸다.
앞서 양 전 대법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는 국제인권법연구회·인사모 대응방안 검토 지시와 관련해 임 전 차장이 직권을 남용했거나 하급자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켰다고 판단했으나 이날 재판부는 이 역시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수사 초기 언론을 통해 국민의 뇌리에 각인됐던 ‘사법 농단’ 사건은 수십 명의 검사를 투입해 300쪽이 넘는 공소장으로 시작됐지만, 대부분 실체가 사라진 채 직권남용죄만 남게 됐는데 이것도 대부분 죄가 되지 않았다”며 “유죄로 인정된 것도 대부분 피고인의 단독 범행이나 예산 관련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검찰의 수사를 지적하기도 했다. 임 전 차장은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차장으로 근무하며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혐의로 2018년 11월 구속기소됐다. 이후 2020년 3월 보석 석방된 뒤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아왔다.
이날 임 전 차장의 유죄 선고로 사법 농단 사건과 관련해 유죄를 받은 인물은 3명으로 늘어났다. 앞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등이 1·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사법 농단의 정점으로 지목된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달 26일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날 판결이 나온 이후 검찰은 사실과 법리를 면밀하게 검토·분석해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