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보험기금채권상환기금(예보채상환기금)에서 공공자금관리기금(공자기금)으로 빠져나가는 자금은 해마다 빠르게 늘고 있다. 2021년 1조 2500억 원이었던 것이 불과 3년 사이 3배를 훌쩍 넘는 4조 2500억 원까지 증가했다. 예보채상환기금은 금융권 구조조정에 쓰였고 금융회사들의 재원 충당도 2021년에 끝났다. 하지만 정부는 법률상 2027년까지 금융회사들의 기금 납부가 명시돼 있다는 이유로 납입을 강제하고 있다. 결국 예보채상환기금은 ‘그림자 조세’로 나라 곳간을 메우는 데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은행권이 가장 크게 반발하는 대목은 부담금을 내야 할 명분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이 같은 ‘관행’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당초 예보채상환기금은 외환위기 이후인 2002년 은행권 구조조정에 필요한 대금을 충당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범했다. 도입 당시 추산한 구조조정 소요 비용은 총 69조 원. 정부는 49조 원을 일시 납부하고 은행은 25년간 20조 원을 분납하는 방식으로 재원 부담을 나눠지기로 했다.
하지만 실제 구조조정에 투입된 비용은 전망치보다 적었고 계획보다 6년이나 이른 2021년 소요 자금을 모두 충당할 수 있게 됐다. 사정이 이런데도 ‘계획상 은행은 2027년까지 부담금을 내게 돼 있다’는 이유로 정부가 출연을 강제하고 있어 은행권의 불만이 큰 것이다. 은행권이 올해까지 추가 부담하는 돈은 10조 5000억 원으로 한 해 평균 2조6000억 원 이상을 감당하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대로라면 앞으로 5년 동안은 매년 준조세로 수조 원을 내야 하는 상황”이라며 “금융회사가 납부하는 특별기여금이 예금 잔액에 연동돼 있으니 자연스레 출연금도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토로했다.
금융회사들은 당초 분담하기로 한 몫을 거의 충당한 만큼 추가로 부담금을 납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금융권에 따르면 부보금융기관의 누적 출연액은 지난해 기준 19조 원 상당으로 약정 금액을 대부분 납부했다. 한 시중은행의 재무 총괄 임원은 “기금을 출범할 때 내세운 대전제가 해결됐는데 명목상 납부 기한이 남았다며 돈을 내라는 것은 지나친 형식 논리”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예보채상환기금 뿐만 아니라 선거철이 가까워지면 ‘상생기금’과 같은 준조세를 수시로 걷어간다”면서 “정부가 민간 부담을 덜어주겠다면서 각종 부담금을 손질하겠다고 했지만 은행만은 논외인 것 같다”고 했다.
물론 정부도 할 말은 있다. 예보채상환기금 출범 당시 은행과 달리 정부는 부담금을 선납했다는 것이다. 은행이 약정 기한까지 돈을 내지 않으면 정부가 당초 계획보다 더 부담을 지게 된다는 논리다. 은행이 당초 약정한 출연금을 대부분 부담했다는 주장에도 “구조조정 대상이 책임을 떠밀고 있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정부 관계자는 “구조조정 자금 마련 당시 가장 큰 원칙은 ‘민간이 최대한 부담을 지고 나머지 몫을 정부가 보조한다’는 것이었다”며 “당장 죽겠으니 살려달라고 하다가 상황이 달라지니 몽니를 부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와 금융권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어 은행들의 부담은 당분간 가중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현행 법에 따르면 모든 부보금융사는 예금 잔액의 0.1%를 매년 출연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구조조정에 투입된 실제 비용에 따라 민관이 분담할 부분을 다시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은행이 초과 부담하는 몫이 있다면 납부 금액의 일부를 돌려주거나 약정 기한을 전보다 앞당기는 안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예금보험공사 사장을 지낸 한 인사는 “은행 입장에서 바라보면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대목이 있긴 하다”면서도 “정부에서 이 문제를 다뤄보려 해도 공연히 ‘은행 편을 든다’는 오해를 살 수 있어 선뜻 나서기 쉽지 않아 약정 기한인 2027년이 돼서야 관련 논의가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은행권의 경영 환경이 전처럼 녹록치 않은 점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금융연구원에 따르면 국고채 3년물 금리는 지난해 하반기 3.8%에서 올해 상반기 3.6%, 하반기 3.4%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통상 금리 하락기에는 예대금리차(예금 금리와 대출 금리 차)가 줄면서 은행의 수익성 지표인 순이자마진(NIM·자산 대비 이자 이익비율)이 줄어든다. 당국이 가계부채 증가율을 경제성장률 이내로 죄겠다고 공언한 만큼 신규 대출 증가세를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금융연구원은 “신용위험 상승 등으로 자산 성장세 둔화가 예상되는 가운데 시장금리 하락으로 순이자마진은 다소 축소돼 은행 이자이익은 소폭 감소할 것”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