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이르면 연내 일본 주도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메가 자유무역협정(FTA)인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신청서를 CPTPP 사무국에 제출할 것으로 전망된다.
25일 세종 관가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늦어도 4월 발표할 예정인 ‘신(新) 통상정책’에 CPTPP 가입과 관련한 내용을 담을 것으로 확인됐다. 2022년 4월 열린 제228차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CPTPP 가입 추진계획’이 의결된 지 약 2년 만에 본격 시동을 거는 셈이다.
CPTPP 가입 협상을 위한 남은 국내 절차가 국회 보고뿐인 상태였으나 CPTPP의 시장개방 수준이 한미 FTA, 한중 FTA 등보다 높아 농어민들이 결사 반대한 데다 일본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금지 해제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잠정 보류됐다.
실제로 산업부는 새정부 출범 직후인 2022년 7월과 이듬해인 2023년 1월 공개한 ‘산업통상자원 정책방향’에서 CPTPP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올해 들어서야 ‘CPTPP 가입 여건 조성’을 처음 포함시켰다. 후순위에 미뤄놨던 CPTPP를 다시 전면에 끄집어 내려는 것이다. 산업부 산하 국가기술표준원도 지난해 말 시험인증서비스 분야의 개방을 유도하고 정보통신 분야에서의 기술이전을 방지하는 CPTPP의 무역기술장벽(TBT) 조항에 대한 추가 법률 검토를 진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CPTPP 가입 추진은 문재인 정부 막판에 결정됐으나 2022년 4월 발표된 윤석열 정부의 110대 국정 과제 중 하나이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CPTPP,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아우르는 ‘중추국(P.I.P.E·Pivot to Indo-Pacific Economy) 전략’을 수립한 바 있다. 우리나라가 경제안보와 전략적 통상협력의 핵심지역인 인도·태평양 역내 선진국·개도국 간 파이프 역할을 하며 아태 지역 신무역질서 형성에 기여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이후 2년 가까이 우리 정부는 농어민 등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경색됐던 한일 관계를 완전히 복원하는 등 물밑 노력을 지속했다. 특히 지난달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와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가 한국의 CPTPP 가입추진을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하면서 CPTPP 가입 재추진을 위한 발판이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시기적으로 CPTPP 가입을 공론화할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고 해석했다. 올 3월은 윤 대통령의 방일 1주년이 되는 달이다. 때마침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방한 가능성이 거론되는 달이기도 하다. 일본 언론들은 메이저리그(MLB) LA 다저스 소속 일본 야구선수인 오타니 쇼헤이가 한국에서 개막전 경기를 치르는 것을 계기로 양국 정상이 만날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았다.
2018년 12월 출범한 CPTPP의 회원은 일본,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멕시코, 칠레, 페루, 싱가포르, 베트남,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영국 등 12개국이다. 이들의 합계 국내총생산은 14조 8000억 달러, 합계 인구는 5억8000만 명가량이다.
세계 무역량 15% 거대 시장 열려…한일 경제·안보 협력 강화 계기도
-"실질 GDP 0.33~0.35%포인트↑…소비자후생 30억달러 증가"
-피해 보전, 국내 수요 기반 확충 등 농수산업계 달래기는 과제로
윤석열 정부가 잠정 보류했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신청을 재추진하려는 것은 ‘슈퍼 선거의 해’인 올해부터 수년간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크게 요동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일본은 물론 호주 등 인도·태평양 지역 자원 부국들과 상호 협력을 강화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CPTPP 가입은 역내 단일 원산지 기준 족용에 따라 공급망 구축이 용이해질 뿐만 아니라 대중(對中) 교역이 흑자에서 적자로 돌아서고 있는 ‘무역구조 대전환기’ 우리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
전세계 교역량의 15%(지난해 7월 영국 가입 미반영)를 차지하는 거대 시장이 열릴 경우 우리 경제는 교역 확대와 생산·투자·고용 증가로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0.33~0.35%포인트 증가하리라고 국책연구기관들은 전망한다. 소비자후생 규모도 30억 달러 증가할 뿐만 아니라 15년간 연평균 6억~9억 달러 규모의 순수출 증가와 함께 1조 1800억~1조 8200억 원 규모의 생산 증대 효과가 나타나리라는 분석이다. 다만 생산 감소가 불가피하다는 농수산 업계의 우려를 감안해 CPTPP 협상 타결 전까지 충분한 피해 보전과 피해품목 경쟁력 제고, 국내 수요 기반 확충 등 지원 대책을 마련하는 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25일 세종 관가에 따르면 산업부는 지난달 말 공개한 새해 주요업무 추진계획에서 “전세계 GDP 90%로 우리나라 ‘경제영토’를 지속 확대하겠다”며 인태시장 확보를 위해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활용 및 CPTPP 가입여건 조성을 공식화했다. 우리의 경제영토는 지난해 12월 말 기준 59개국, 21건의 FTA를 체결해 전세계 GDP의 85% 수준이다. FTA가 서명·타결된 곳도 필리핀, 아랍에미리트(UAE), 에콰도르, 과테말라(한·중미 FTA 가입), 걸프협력회의(GCC) 등 다수 있다.
여기에 일본이 주도국인 CPTPP를 추가하려는 것은 한일 FTA나 한중일 FTA가 장기간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CPTPP가 더할나위 없는 대안이 될 수 있어서다. CPTPP 가입은 윤 정부의 신(新) 통상전략의 핵심 키워드이기도 하다. 2022년 4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연차별 일정도 짜놨다. 당시 인수위는 CPTPP 가입추진계획 수립(대경장)→통상절차법 제6조에 따른 국회(산중위) 보고→기탁국에 CPTPP 가입 신청서 제출→대국민 공감대 형성 등의 로드맵을 제시했다. 국회 허가 사항은 아니다. 인수위의 한 관계자는 "가입 신청서 제출을 전후해 CPTPP 의장국, 부의장국 등 주요 회원국과 아웃리치(Outreach·비공식 활동)를 통한 조속한 가입절차 개시를 협의할 작정”이라고 설명했다. CPTPP 순환 의장국은 지지난해 싱가포르, 지난해 일본, 올해 캐나다 순이다.
그러나 농어민들이 CPTPP 가입 신청 시도에 강력히 항의하면서 급제동이 걸렸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등 9개 농어민 단체로 구성된 ‘CPTPP 저지 한국농어민 비상대책위원회’는 “역대 최고 수준의 시장개방을 지향하는 CPTPP에 가입할 경우 그 어떤 자유무역협정(FTA)보다도 농수산업 부문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그런데도 정부는 피해 산업 종사자에 대한 배려 없이 가입 신청을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2022년 7월 안덕근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현 산업부 장관)은 “CPTPP가 도화선이 돼 과도한 사회 분란을 야기한다면 큰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면서 “지금은 (가입 신청을 하기에) 위험한 시기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CPTPP는 새 정부 통상정책에서 변방에 머물러야 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올들어서다. 새정부 통상정책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정인교 통상교섭본부장이 임명되면서 새로운 추진 동력을 얻었다. 정 본부장은 인하대 교수 시절 서울경제에 수차례 기고를 통해 CPTPP 가입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 악화로 CPTPP 가입을 미뤄왔지만 윤석열 정부는 CPTPP 가입을 서둘러야 한다”며 “윤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세운 ‘한일 정상 셔틀 외교 복원’과 ‘김대중·오부치 선언 2.0 공동 번영 시대’ 실현한다면 자연스레 CPTPP 가입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민간에서도 힘을 보태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와 일본경제단체연합회는 지난달 수출규제 종식 이후 첫 한일재계회의를 ·열어 양국 스타트업 육성, 한·미·일 3국 경제협력체 신설, 한국의 CPTPP 가입 추진 등 한·일 경제협력의 청사진이 담긴 공동성명을 내놓았다. 실제 한국과 일본이 정부 재정을 함께 출자해 벤처·스타트업 투자 전용 펀드를 조성하는 방안을 협의하는 등 성과가 나타나자, 다음 차례는 CPTPP 가입 신청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김봉만 한경협 국제본부장은 “한일재계회의 출범 이래 한일 양측 경제계가 협력해 한국의 CPTPP 가입을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 공동성명서에 담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지난해부터 이어온 한일 관계 호전에 따른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