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시대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주요국 간의 반도체 대전이 가열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만년 3위’인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27일 세계 최초로 AI 반도체의 핵심 부품인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3E) 양산을 선언했다. D램을 8단으로 쌓은 HBM3E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그래픽처리장치(GPU)에 탑재될 예정이다. HBM은 D램을 여러 겹으로 쌓아 올려 성능을 극대화한 초고속·고용량 메모리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사실상 시장을 양분해왔다. 마이크론의 역습은 국가 대항으로 펼쳐지는 반도체 전쟁 격화에 따른 지각 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AI 패권을 둘러싼 글로벌 전쟁에서 K반도체의 아성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경고다.
특히 노골적인 ‘자국 우선주의’를 등에 업은 미국의 공세가 매섭다. 미국 정부가 반도체법에 따라 지원할 총 527억 달러(약 70조 원)의 보조금과 연구개발(R&D) 지원금의 상당 부분이 미국 기업에 몰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게다가 최근 마이크로소프트가 AI 칩 생산을 인텔에 맡기기로 하는 등 미국 기업들끼리 일감도 몰아주는 분위기다. 일본은 대만 TSMC 공장 유치에 10조 원 이상을 쏟아부을 정도로 반도체 부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일본과 손잡은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1위 TSMC는 2위 삼성전자와의 격차를 더 벌릴 수 있게 됐다.
우리 기업들은 초격차 기술을 앞세워 ‘나 홀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엔비디아의 발표 직후 삼성전자는 기술력이 더 뛰어난 세계 최초의 12단 HBM3E 개발 소식을 알렸다. 하지만 글로벌 반도체 총력전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에는 정책적 뒷받침이 턱없이 부족하다. 올해 말로 예정된 15%(대기업 기준)의 시설투자 세액공제 혜택 일몰을 연장하기 위한 ‘K칩스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여부도 불투명하다. 정부와 정치권은 전방위 지원과 규제 혁파로 기업들이 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업들도 정부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우리가 AI 반도체 경쟁에서 밀린 것은 기업들이 미래 전략 수립과 투자, 인재 육성에 소홀했던 측면도 있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 등 빅테크 거물들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해외 주요 기업들과의 연합전선도 적극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기업과 정부·정치권이 원팀이 돼 K반도체의 압도적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